안서 김억金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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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안서 김억金億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안서 김억(金億)
1. 작가의 생애와 문학 활동
호는 안서(岸曙), 본명 희권(熙權). 1896년 11월 30일 평북 정주 곽산에서 출생하였다. 오산중학교를 거쳐 1913년 일본 게이오 의숙 문과에 입학했으나 아버지의 죽음으로 중퇴했다. 귀국 후 오산중학교 및 평양 숭덕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했으며, 동아일보·매일신보 기자, 경성 중앙방송국 차장 등으로 언론계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8.15후 출판사 수선사(首善社) 주간을 역임하였고, 6.25 당시 서울에 남아있다가 납북되었다. 북한에서는 출판사 교정원(1952)으로 일하다가 신병으로 요양소에 입소했으며(1953.4), 다시 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에 강제 임명되었으나(1956.7), 이후 평북 철산지방의 협동농장으로 강제 이주당했다(1958). 그 후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김억은 서구시 및 시론의 번역소개와 아울러 창작시를 병행 제작함으로써 한국 초기시단을 이끌어간 대표적 시인이다. 그는 1914년 4월 창간호에 시「이별」「야반」「나의 적은 새야」산문시「내의 가슴」「밤과 나」를 내놓고, 이어서 1918년 에 10여 편의 창작시와 서구 상징시를 번역 소개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동인지 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1920년 7월25일 창간한 순수문예 동인지 에 염상섭, 오상순 등과 핵심 동인으로 참가해 주로 프랑스 상징주의 문학을 소개했고, 최초의 서구시의 번역시집 는 1920년대 상징적, 퇴폐적 시풍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는 신념으로 우리말의 어감과 어향(語響)에 알맞게 번역함으로써 번역을 통한 한국어의 가능성에 충격을 주기도 하였으나 상징시를 수용함에 있어 음악성과 감상성에 치우쳤다는 한계를 보인다.
1923년 6월 근대 최초의 개인 시집 를 간행하고, 1925년 이후 전통지향성으로 회귀, 한시 번역에 치중하였다. 한국적 정서와 가락을 살려낸 민요시 제작에 몰두하여 시집 등을 펴내어 75조, 44조 등의 민요조에 입각한 창작시를 발표함으로써‘민요시인’이라는 평을 듣는다. 김소월의 스승으로 그를 문인으로 길러낸 공적도 크며, 인생의 무상과 비애를 담담한 민요조로 노래한 초기 서정시는 이 땅의 자유시, 서정시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2. 작품 경향과 변모 과정
안서의 문학경력은 크게 전기, 후기로 구분할 수 있다. 그의 문학은 1924-5년경을 기준으로 큰 변모를 보이는데 전기는 자유시형, 외래지향, 서구시의 번역소개 등으로 설명될 수 있는 반면 후기는 소위 격조시(민요시)형, 전통지향, 고전 및, 한시의 번역과 소개 등으로 설명될 수 있다.
전기
전기의 김억은 외래 지향적인 단면을 강하게 드러낸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문학 초기에 있어서 김억은 주로 상징주의 수입과 관련하여 자유시, 산문시를 모색하면서 그의 시세계를 탐구하였다. 근대 시인들의 장르 의식의 결여로 시적 인식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음은 물론 근대시 전개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그에 대해 말하면서 불란서 상징파 시인들의 작품 번역을 빼놓을 수 없다. 즉 보들레르, 베를렌 및 아일랜드의 예이츠 등에서 나타나는 우울하고 고독한 정서는 19세기의 상업주의에서 소외된 문학 지식인들의 정신적 지향을 대변한 독자적인 미의식에 해당된다. 이러한 미의식과 일제 식민지 차하의 젊은 문학도였던 김억의 내적 번민과는 상당 부분 통하는바가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후기
번역을 통해 서구 문학에의 경도(傾倒)를 보이던 김억은 1920년대 중반기부터 전통적인 민족의 정서애로 관심의 전환을 보이게 된다. 초기시의 서구적 색채를 벗고 민요 서정시로 돌아온다. 김억은 ‘외래 사조와 외래 감정’을 배격하고 우리 주위의 사상과 감정을 바탕으로 시작(詩作) 하기를 역설한다. 이를 위하여 이념으로는 ‘조선심’을, 그리고 문학적 소재로는 ‘향토성’을 제시한다. 따라서 그가 말한바 우리 주위에 자리한 사상과 감정, 그리고 ‘조선심’은 구체적으로 향토적인 정서에 있는 셈이다. 그에 의하면 한 민족의 고유성은 향토성에 의존하는 것으로, 따라서 ‘민족을 대표할 수 있는 고유의 문예도 향토적인 데서만’가능하다는 것이다. 그의 민요조의 가락과 인생의 애상과 한을 노래하는 내용은 제자 김소월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3. 김억의 시 세계
1) 전기 : 습작기와 자유시 이론의 확립과 실험기 (1914-1923)
(1) 습작기 (1912-1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