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준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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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태준의 생애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발표보고서 작성 요령
1. 발표 요약문
1) 이태준의 생애
- 1904년 1월7일 소설가 이태준이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1남2녀 중 장남이었다.
즉 25년에 데뷔작을 발표하고 3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이태준은 상당히
늦게 문학활동을 시작한 셈이다. 이태준은 소실의 자식이었는데 이태준의 아버지인 이문교는 개화파라는 이유로 의병들의 습격을 받아 산 속으로 피신하는 등 어려운 삶을 보내지만 아버지 이문교가 병으로 죽고, 3년 뒤 이태준의 모친마저 산고 후유증으로 세상을 하직한다. 이때부터 이태준은 양친을 잃고 고아가 된다.
- 나이 9세 적. 고아로 친척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까닭에 주변의 동정과 괄시를 받으면서 어렵게 봉명학교를 졸업하는데, 그래도 남다른 강인함과 성취욕을 지녀서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중학을 졸업하고 15세가 되던 해 이태준은 원산으로 가출을 하고 2년동안 하다 상경한다. 그 후 어렵게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한한 이태준은 어렵게 학비를 조달하며 다니나 그의 성적은 비교적 우수한 편에 속했다. 그러다 이태준은 교주의 비리에 대항하는 동맹휴교 사건에 그가 깊이 관여한 혐의로 주모자로 인정되어 퇴학처분을 받은 그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동경 유학길을 떠나게 되었다.
- 동경 유학길에 떠난 후 동경 상지대에 입학한 이태준은 더욱 더 어려운 생활을 하며 고
학생활을 이어나간다. 그의 동경생활은 한마디로 가난과 병고, 그리고 고독감 등으로 점철된 매우 암담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태준은 이같은 어려움을 끝내 감내하지 못하고 중도에서 학업을 포기한 채 귀국길에 오른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여러 신문사와 모교인 휘문고보에 취직을 의뢰했지만 냉담한 반응만 보였을 뿐 어느 누구 하나 반겨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태준으로서는 심한 좌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다시 방황하기 시작하는데 특히 이 시기는 그가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 냉대를 체험하면서 작가로서의 역량을 축적하던 준비기라 할 수 있다
- 이화여전 음악과를 졸업한 이순옥과 결혼한 지 3년이 되던 당시 이태준은 장녀 소명과 장남 유백을 두고 있었고, 22세에 「오몽녀」로 등단한 이래 「산월이」, 「봄」, 「실락원 이야기」등을 발표하면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절이었다. 박태원·정지용 등과 어울려 구인회를 조직하는 등 기반을 잡아가던 시기였다. 1933년, 이태준이 30세가 되던 해에 현재 성북동의 생가를 짓게 된다. 성북동 집에서 그를 대표하는 「달밤」「손거부」「가마귀」 「복덕방」 「패강냉」 등등의 주옥같은 작품을 써냈던 것이다. 이 시기에 발표한 작품들은 대부분 이태준의 안정된 생활을 반영하듯이 간결하고 치밀한 문장과 빼어난 분위기, 인물묘사를 특징으로 한다. 이태준의 전성기였던 이 시절 1933년 김기림ㆍ이효석ㆍ유치진ㆍ정지용ㆍ이무영 등과 함께 문학동인회 ‘구인회(九人會)’를 결성하여 탈(脫)정치문학을 옹호했다.
- 《문장》지의 편집자로 활약하면서 창작 활동을 계속하다가 일제의 탄압이 가열해지자 이태준은 별로 저항하는 자세를 보이지 않고 현실에 순응했다. 그리하여 친일적 경향의 글을 몇 편 쓰기도 하였지만, 그 활동이 소극적이고도 미온적이었으며 작품 내용 또한 친일성향이 그다지 격렬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결국 낙향하여 유유자적하다가 이윽고 해방을 맞는다. 해방 후 그는 좌익계열의 문학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한편, 「해방전후」를 발표하면서 일대 사상적 전환을 보였다. 그리고 47년 7월경 돌연 월북했다. 순수문학을 지향하던 그의 월북은 당시 문인들에게조차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의 월북은 해방기의 정치ㆍ사회적 정황에 미루어 볼때 남한의 과도정권의 부패성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 월북 후, 이태준은 한동안 북한 문단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김일성대 교수인 정률은 그를 들어 ‘조선의 모파상’이라고 불리기 까지 했다. 그러나 그와 그의 문학작품들은 종전 이후 남로당­소련파의 몰락과 함께 갑자기 북한 문단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953년 휴전 후 김일성계는 전쟁 책임을 남로당에게 전가시켜 그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기 시작하는데 이태준은 겨우 생명은 부지하지만 작가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한 채 추방되어 인쇄공이 된다.
10년의 추방 생활 이후 평양으로 돌아왔으나, 1974년 다시 사상투쟁을 겪고 탄광지구로 재추방되었다. 이 사건 이후로 이태준의 아내가 죽고 이태준은 이때부터 행방불명 된다.
2) ‘복덕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