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석정夕汀 신석정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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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신동엽론
Ⅰ. 작가의 생애
시인 신동엽은 1930년 8월 18일 충남 부여읍 동남리에서 농사를 짓는 아버지 신연순과 어머니 김영희 사이 1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3년 부여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국가에서 숙식과 학비를 지원해주는 전주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신동엽은 학창시절을 겪으면서 현실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강한 저항 의식을 갖게 된다. 이는 그가 전주사범 시절 아나키즘에 관련된 서적을 탐독하면서 얻은 무정부주의적 의식과 중립적인 이미지, 유토피아적인 정신세계를 형성했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1948년 동맹휴학으로 학교가 잠시 쉬자 고향으로 내려가 있었던 신동엽은 1949년 부여 주변에 있는 국민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하지만 시인은 3일 만에 교사직을 그만두고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전주사범을 졸업하고 어려운 집안사정으로 인해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부여에서 머문다. 이때 평생의 절친한 친구인 구상회를 만나 부여와 공주의 유적을 기행하면서 동양의 혼과 백제를 비롯한 한반도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내려가 그해 9월 말까지 부여 민족청년회 선전부장으로 일하다 국민방위군에 징집됐다. 한국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과 대한민국 국군(국민방위군)에 각각 징집되어 동족상잔의 비극을 체험한 후 첫 작품 〈나의나〉를 완성했다. 특히 국민방위군 시절 부패한 군간부와 공무원들이 군수품을 임의로 처분하는 바람에 많은 고통을 겪게 되는데, 그것 때문에 강한 사회 비판과 현실 참여적 성향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먹은 민물고기 때문에 간디스토마에 걸려 일생을 두고 고통을 겪었다.
1953년 단국대를 졸업한 뒤 제1차 공군 학도간부후보생에 지원, 합격을 했으나 발령은 받지 못했다. 그 뒤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자취방을 얻었다. 그리고 친구의 도움으로 돈암동 네 거리에 헌책방을 열었다. 신동엽은 이때 이화여고 3학년이던 부인 인병선을 만났다. 1957년 인병선과 결혼한 뒤 고향으로 낙향했다. 이때 인병선은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부여 읍내에 양장점을 열었다. 이와 함께 신동엽 또한 충남 보령군 주산농업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1958년 각혈을 동반한 폐결핵을 앓게 되면서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 돈암동 처가에 아내와 자녀를 올려 보낸 뒤 고향 부여에서 요양하며 독서와 글쓰기에 빠진다. 1959년 독서와 문학 습작에 몰두하다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大地)〉를 석림(石林)이라는 필명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60년 신동엽은 건강을 되찾아 서울에 있는 교육평론사에 취업한 뒤 성북구 동선동에 터를 잡았다. 그해 《학생혁명시집》을 집필하며 4·19 혁명에 온몸으로 뛰어들었다. 그래서 신동엽을 가리켜 4.19 시인으로 평가하는 문인들이 많다. 그리고 훗날 4·19 혁명의 기억을 되살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와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가 나올 수 있었다. 1961년 명성여고 야간부 교사로 안정된 직업을 얻게 되어 시작에 몰두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1964년 건국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9년 4월 7일 간디스토마가 간암으로 악화되어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그의 주검은 부여읍 능산리 고분 주변 야산에 묻혔다. 그 뒤 부여읍 백제대교 부근에 시비〈산에 언덕에〉가 세워졌으며, 1982년 그의 뜻을 기려 신동엽창작기금이 조성되어 매해 신동엽창작상을 수여한다.
신동엽 시인은 1959년 조선일보를 통해 등단한 후 불과 10년 만인 1969년 4월 7일 간암으로 세상을 뜬 탓에 현재까지 전해지는 시 작품은 70여 편에 불과하다.
Ⅱ. 작가의 작품 경향
1950년대의 우리 시단은 모더니즘의 물결과 전통 지향적 보수주의의 조류로 크게 나뉘어 대립하는 듯한 양상을 보이면서도 역사와 현실의 진정한 문제를 피해 가고 있다는 점에서는 거의 모든 시인이 일치하는 형국을 드러내었는데, 신동엽은 이런 풍조를 철저히 배격하는 자리에서 스스로의 시세계를 출발시켰다. 당대 시단의 양대 주류를 거부한 채 처음부터 민중적 지식인으로 시를 익히고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다.
1950년대에 신동엽은 생애 가운데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가장 커다란 고통을 경험한다. 해방 후의 갈등이 6·25와 남북 분단, 전후의 폐허로 이어지며 그가 겪게 된 허무와 상실감은 매우 컸다. 그의 의식은 민족사의 비극인 6·25를 체험하면서 현실에 대한 인식이 구체화된다. 이로 인해 민족의 정신적 실체를 찾기 위한 노력이 동학 동학혁명은 분명 민족사에 최초로 기록될 사건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유의지와 평등사상 및 인간존재에 대한 재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상에 대한 관심으로 집약되었고, 이것이 서사시 「금강」을 낳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그는 전후의 폐허에서 심한 고통과 갈등을 겪는데, 아픔을 딛고 시 쓰기에 몰두하여 1959년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조선일보』신춘문예에 입선하여 문단에 데뷔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20여행이 삭제되어 발표되고, 「진달래 산천」으로 불온성 문제에 시달리게 된다.
참고문헌
※ 참고문헌
-한국근현대문학사, 윤병로, 명문당, 1991.
-한국문학통사, 조동일, 지식산업사, 2005.
-윤희재의 현대시, 윤희재, 희소, 2008.
-신동엽 시 연구, 오신숙,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 1999.
-신동엽 시 연구, 이심훈,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