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의 화론 왕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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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화론 왕유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당대의 화론

수묵산수화파의 왕유
중국 당(唐)의 시인이자 화가로서 자(字)는 마힐(摩詰)이고 분주(汾州, 지금의 山西省 汾陽) 출신이다. 상서우승(尙書右丞)의 벼슬을 역임하여 왕우승(王右丞)이라고도 불린다. 그가 태어난 해와 죽은 해는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에 각기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구당서(舊唐書)》에는 699년에 태어나 759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신당서(新唐書)》에는 701년에 태어나 761년에 죽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사마(司馬) 벼슬을 하던 왕처렴(王處廉)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도였다. 때문에 왕유는 어려서부터 불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그의 이름인 유(維)와 자(字)인 마힐(摩詰)도 《유마경(維摩)》에 나오는 거사(居士) ‘유마힐(維摩詰)’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우인 진(縉)과 함께 어려서부터 시(詩)와 서(書), 음곡(音曲) 등에 뛰어난 재주를 나타냈다. 9살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15살에는 당(唐)의 수도였던 장안(長安, 지금의 西安)으로 유학을 가서 황실(皇室)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현종(玄宗, 재위 712∼756) 때인 721년(開元 9년)에 진사(進士)에 급제(及第)하여 태악승(太樂丞)이 되었다. 한때 제주(濟州, 지금의 山東省 荏平縣)의 사창참군(司倉參軍)으로 좌천되었다가 관직을 떠나기도 하였으나, 734년(開元 22년) 우습유(右拾遺)로 발탁되어 다시 중앙의 관직으로 복귀한 뒤 감찰어사(監察御史), 좌보궐(左補闕), 고부낭중(庫部郞中) 등을 역임하였다. 어머니 최씨(崔氏)가 죽은 뒤 상(喪)을 치르기 위해 관직에서 잠시 물러나기도 했지만, 현종(玄宗) 말기에는 이부낭중(吏部中)과 급사중(給事中) 등의 요직(要職)을 역임하였다.
755년 안사의 난이 일어나고, 756년 장안(長安)이 점령되자 왕유(王維)는 반란군에 사로잡혀 뤄양[洛陽]으로 끌려갔다. 이 곳에서 그는 벼슬을 받았지만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남전(藍田, 陝西省 長安 동남의 縣)의 중난산[終南山] 기슭에 세운 망천장(輞川莊)에 머물며 시(詩)로서 자신의 마음을 나타냈다. 758년 현종(玄宗)의 뒤를 이은 숙종(肅宗, 재위 756~762)이 반란군을 물리치고 장안(長安)과 뤄양[洛陽]을 탈환한 뒤에 그는 안녹산(安祿山)에게 벼슬을 받은 일로 문책을 받았지만 사정이 인정되어 사면(赦免)을 받았다. 그리고 태자중윤(太子中允)으로 등용된 뒤,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 중서사인(中書人), 급사중(給事中)을 거쳐 상서우승(尙書右丞)이 되었다.
이처럼 왕유(王維)는 당(唐) 문화가 가장 화려하게 번성했던 시기에 고위 관직을 역임했을 뿐 아니라,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화가, 음악가로서 다방면에 모두 이름을 떨쳤다. 시인으로서 그는 시선(詩仙)이라고 불리는 이백(李白, 701~762), 시성(詩聖)이라고 불리는 두보(杜甫, 712~770)와 함께 중국의 서정시 형식을 완성한 3대 시인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의 시에는 불교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있어 시불(詩佛)’이라고도 불린다. 그는 그림에도 뛰어나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의 개조(開
祖)로 여겨지고 있다. 송(宋, 960∼1279) 때의 소식(蘇軾, 1036~1101)은 그의 시와 그림을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라고 평하였다.
왕유(王維)의 시는 전기와 후기가 뚜렷한 차이를 나타낸다. 전기의 시들이 도회지의 삶을 소재로 하고 있는데 비해 후기의 시들은 전원 생활과 자연의 정취들을 나타내는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그 가운데 자연의 청아한 정취를 소재로 한 후기의 작품들이 특히 높은 예술적 성취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평가를 받는데, 만년(晩年)에 남전(藍田)의 망천장(輞川莊)에 은거하면서 지은 작품들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자연을 소재(素材)로 한 오언(五言) 율시(律詩)와 절구(絶句)에 뛰어난 성취를 보여 육조(六朝) 시대부터 내려온 자연시(自然詩)를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동진(東晋, 317∼419)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전원시(田園詩)와 송(宋, 420∼478) 사령운(謝靈運, 385~433)의 산수시(山水詩)의 영향을 받아 회화(繪)의 기법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자연시(自然詩)를 크게 발달시켰다. 당(唐) 시대의 자연시(自然詩) 전통을 대표하는 인물을 ‘왕맹위유(王孟韋柳)’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왕유(王維)와 위응물(韋應物, 737~804), 맹호연(孟浩然, 689~740), 유종원(柳宗元, 773~819)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 가운데에서도 왕유는 자연시(自然詩)를 대표하는 중심 인물로 평가를 받는다. 그의 시는 《왕우승집(王右丞集)》으로 전해진다.
한편 그는 정건(鄭虔), 오도자(道子) 등과 함께 중국 남종화(南宗畵)의 개조(開祖)로 여겨지고 있으며, 전문적인 화가가 아니라 시인이나 문인들이 그리는 문인화(文人畵)의 발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인물이나 꽃, 대나무, 산수(山水)의 정경 등 다양한 소재를 그림으로 나타냈는데, 특히 수묵(水墨) 산수화(山水畵)로 이름을 떨쳤다. 당시에는 장안(長安)에 있는 건축물에 그린 ‘장벽산수화(牆壁山水畵)’나 《창주도(滄州圖)》, 《망천도(輞川圖)》 등이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오늘날에 확실한 진본(眞本)들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그의 작품들이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쳐 구도나 표현들을 모방한 사본(寫本)들이 다양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들 사본(寫本)들과 기록들에 근거해 어느 정도 그 작품들의 구도와 내용들이 확인되고 있다.
왕유의 작품
상단의 그림은 라고 하는데 우편에는 괴이한 절벽이 산과 연결되어 있고 절벽 밑에 4, 5채의 민가가 있으며 민가의 앞뜰에는 두 사람이 길을 가고 있다. 민가의 주변에 죽림과 잡목들이 눈에 덮힌 채 황량히 서있는 뭉경을 그렸다. 강 건너엔 또다른 풍경이 있고 강 위에는 기러기 떼가 줄지어 무수히 나는 풍경을 그려 왕유 그림의 특징을 잘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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