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대의 군사훈련

 1  세종시대의 군사훈련-1
 2  세종시대의 군사훈련-2
 3  세종시대의 군사훈련-3
 4  세종시대의 군사훈련-4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세종시대의 군사훈련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제 목 : 세종시대의 군사훈련
요번 레포트는 자신의 전공에서 바라 본 세종시대와 그 정치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다. 전공이 체육이므로 세종시대의 체육 활동에 대해서 알아보고 그 정치에 대해 설명을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세종대왕에 대해 공부를 해오면서 문화 업적에 관한 내용은 많이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토지제도를 중심으로 한 농정개혁으로 조세 기준을 명확히 하였을 뿐 아니라 농정 기술을 보급해 생산성을 향상 시킨 것, 측우기, 해시계, 물시계 등의 기술 개발을 추진한 것 등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훈민정읍 창제는 수없이 들어왔다. 하지만 몸이 병마에 시달리고 약했던 세종대왕은 책읽기를 좋아 했지만 운동은 많이 하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세종시대의 체육활동 및 운동에 대해서는 알아보고 조사하는 것이 막막 했었다. 하지만 세종시대에는 4군6진, 대마도 정벌, 쓰시마 섬 정벌 등 여러 크고 작은 전쟁이 있었다. 여기서 군사들이 훈련 하는 과정 및 무과 시험 절차에서 세종시대의 체육 활동을 알아 볼 수 있었다.

먼저 세종대왕의 군사 정치에 대해 간략히 말하면 국토의 개척과 확장도 빼놓을 수 없는 세종대왕의 업적이다. 두만강 방면에는 김종서를 보내서 육진을 개척하게 하였고, 압록강 방면에는 사군을 철치 하여 두만강과 압록강 이남을 영토로 편입하는 대업을 이루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국방의 중요성은 빠져서는 안 되는 일이다. 여기서 김종서가 세종에게 군사증원을 하기 위해 상소문을 올린 것을 일부분 옮겨 보겠다. “군사를 훈련시키려 하면 어떤 이는 ”백성이 굶주리고 할 수 없다“하고, 무기를 수리해 놓으려 하면 ”백성이 가난하니 할 수 없다“하고, 군인의 숫자를 점검해 보려고 하면 ”백성이 놀라서 시끄럽게 되니 할 수 없다“하고, 군대를 출동 시켜려 하면 ”국고가 비어 있으니 안 된다“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백성이 굶주리고 국고가 비어 있다고 해서 오랑케가 쳐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이미 안일함에 빠진 언관과 언론은 불가를 외치며 세종을 고뇌에 빠지게 했다.

또한 동쪽의 일번에 대하여는 강경책과 회유책을 함께 썼다. 세종 1년에는 이종무 등에게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하게(대마도 경사도에 편입) 하는. 강경책을 쓰기도 하였으나. 세종 8년에 삼포를 개항하고 세종 25년에는 계해약조를 맺어 이들을 회유하기도 하였다. 또한 전쟁이나 왜구의 침입 등 위급한 상황에 인접마을이나 왕이 있는 수도로 신호를 보내는 통신수단인 봉화대를 설치하였다. 이와 같은 사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이 문치만을 힘쓰지 않고 군사 훈련, 화기의 제조 또는 개발, 성진의 수축, 병선의 개량, 병서의 간행, 등 국방책에도 힘을 기울인 결과이다.
이번에는 군사훈련(체육활동)을 몇 가지 알아보자.
1. 검도
검도는 현제에도 많은 체육인들이 배우고 있다. 조선시대는 문신위주의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는 무인들 개개인의 단병기술이나 군사적 훈련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유교적 덕목을 더욱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의 무인들의 예전의 무인정신이나 기백을 계승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조의 무인은 유교적인 무인정신이 강조되는 새로운 차원의 무인으로 변해갔다. 곧 조선시대의 유교적 무인들이다. 그러나 국가정책에 있어서는 이러한 유교적 무인들도 천시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조선시대의 양반 계급사회)에서 도.검의 장인들 또한 고유의 장인정신이 없었고, 기능적인 무기 생산에 그쳐 전대의 뛰어난 세공기술을 전승받지 못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무예를 장려하여 신라 때의 격검과 유사한 교육적 훈련이 군에서 시행되었으며 특기할 것은 궁중에서 종친과 문무관 사이에도 이러한 격검이 유행하였고 왕이 친히 시열(한 예도 많았다. 격봉·격검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어 현대 검도경기의 초기적 태동이 있었다고 할 것이다.
태종은 목창과 목검·목정을 쓰는 갑사(甲士)와 방패군의 각투를 시열하였으며 세종은 목검과 목극으로 겨루는 단병접전의 교습을 관람하기도 하였다. 이 당시 이첨은 경주에서 의 실연을 직접 보고 이에 대한 자신의 역사적 소견을 피력한 내용이 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 책에는 서거정을 비롯한 많은 문인들이 황창랑에 관하여 쓴 시문이 있어 이때만 하여도 신라의 이 어떤 형태로든 계승되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2. 씨름
고려시대를 거치며 유흥과 오락의 일면을 보이던 씨름이 점차 마을과 마을의 대항전이나 풍년을 기원하는 숙원행사, 단오절 씨름놀이 등 연례적인 대규모 축제의 형식으로 자리잡은 시기로 보여 진다. 고려시대를 거치며 유흥과 오락의 일면을 보이던 씨름이 점차 마을과 마을의 대항전이나 풍년을 기원하는 숙원행사, 단오절 씨름놀이 등 연례적인 대규모 축제의 형식으로 자리 잡은 시기로 보여 진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세종실록 제4권 세종원년(1419년) 6월에 상왕과 왕은 저자도에 행차하여 중류에 배를 띄우고 종친과 더불어 주연을 베풀고. 곧 각력희를 강변에서 군사들이 씨름하는 광경을 보며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 제50권 - 세종12년(1430년) 윤 12월 형조에게 아뢰기를 중상총이 양복산과 서로 씨름을 하다가 양복산이 죽었으니 율(律)에 따라 교형에 처할 것이나 한 등급을 감하고 장례비를 물게 하였다.
세종 13년(1431년) 3월에 왕이 경회루에 거동하여 종친의 활 쏘는 재주를 구경하고 역사 안사의 등으로 하여금 씨름을 하게 한 뒤 차등하여 상을 주었다.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