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과 여순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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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제주 43과 여순사건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1. 이전까지의 제주4.3과 여순사건의 우리가 알고 있던 내용
우리조원 대부분이 제주 4.3 사건과 여건 사건에 대해 잘못 알고 있거나 이름만 알고 있었다. 그러한 이유는 우리가 배운 국사가 정부의 정당성을 위해 거짓으로 꾸며졌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직도 2개의 사건을 공산당의 반란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어떤 사람들은 사건 자체를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위와 사건들을 근거로 우리에게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와 같은 뜻으로 통하며 그 사상은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조는 제주 4.3과 여순 사건을 정부의 자료에 근거한 정보보다는 중립적인 시선으로 사건들에 대해 조사한 논문과 문헌들을 위주로 조사를 진행하였다.
2. 제주 사건 4.3
1) 발생배경
발발원인은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다. 우선 1947년 31절 발포사건을 계기로 제주사회에 긴장 상황이 있었고, 그 이후 외지출신 도지사에 의한 편향적 행정 집행과 경찰서청에 의한 검거선풍, 테러, 고문치사 사건 등이 있었다. 이런 긴장상황을 조직의 노출로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 단독선거 반대투쟁에 접목시켜 지서 등을 습격한 것이 43 무장봉기의 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남로당 중앙당의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다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남로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한 무장대가 군경을 비롯하여 선거관리요원과 경찰 가족 등 민간인을 살해한 점은 분명한 과오이다. 그리고 김달삼 등 무장대 지도부가 1948년 8월 해주대회에 참석, 인민민주주의정권 수립을 지지함으로써 유혈사태를 가속화시키는 계기를 제공했다.
2) 전개과정
4.3 항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1947년 3월 1일 제주읍 관덕정 마당에서 3·1절 28돌 기념집회에 참석한 시위군중을 향해 경찰이 총을 쏘아 6명의 희생자를 내었던 것이다. 3월5일 제주도 3·1사건대책 남로당 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으며, 제주도청을 시발로 민·관합동총파업이 단행되었다. 13일까지 166개 기관단체에서 41,211명이 파업에 가세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3월 7일 계엄령을 선포, 3월 14일 응원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 극우반공청년단체를 파견하여 파업 주도 세력 등 약 2,500명을 무더기로 검거하고 고문한 다음 이 중 250여 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로 인해 총파업은 3월 18일 종식되었지만 미군정의 강경책이 지속되었고 분노를 느낀 도민들은 극우파의 암살을 요구하는 전단을 살포하면서 미군 축출, 경찰 타도 등을 외쳤다. 이에 미군정은 8.15를 기하여 다시 도민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를 단행하여 모두 투옥하였다. 이를 피하기 위해 수십 명의 도민 지도자들이 한라산으로 입산하기 시작하여 점차 많은 수의 도민들이 한라산으로 입산하였다.
한편 미국은 남쪽만의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였고 유엔(UN)은 유엔 감시하의 남, 북한 총선거의 실시를 결정하게된다. 이에 좌파세력은 남한 단독선거에 반대해 전국적으로 2.7투쟁을 전개하였으며, 미군정은 당시 반미감정이 높았던 제주 도민에 대해 집중적인 공세를 가했다. 이후 마침내 1948년 4월 3일 자정 무장항쟁이 시작되었다. 제주 도민의 무장전위대인 자위대 5백여 명과 그 동조자 1천여 명은 도내 20여 개의 경찰지서 중 10여 개의 경찰지서를 습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숙사 및 국민회, 독립촉성회,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의 요인과 관공리의 집을 공격하였다. 초기 공세에 성공을 거둔 무장세력은 곧 도민과의 협력체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조직개편을 단행하여 지위대를 해체하고 각 면에서 30명씩 선발하여 연대와 소대로 구분 편성된 인민유격대를 조직하였다.
위협을 느낀 미군정은 9연대에 진압작전 출동을 명령하는 등 병력을 증강하였고 부산 등 타 도로부터 차출한 1,700여 명의 경찰을 파견하였다. 또 제9연대장 김익렬에게 강경 진압을 요구했지만 김익렬의 거부로 유격대와의 협상을 명령했다. 그 결과 4월 28일 김익렬과 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이 대좌하여 72시간 내 전투중지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미 군정장관 딘(W. Dean)은 평화협상을 거부하였고 미군정은 방화사건 등 제주도 내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련의 사건들을 유격대의 소행이라고 조작하여 사건의 책임을 9연대와 김익렬에게 물어 김익렬을 해임하고 강경파인 박진경을 기용하여 강경 작전을 준비했다. 이에 대해 유격대와 제주도민들은 5. 10총선거를 거부하기 위한 투쟁을 시작하였다. 이 결과로 제주도에서의 5.10총선거는 3개 선거구 중 두 곳이 무효화되었다.
이에 정부와 미국은 1949년 3월 2일 제주도지구 전투 사령부를 설치하고, 김용주 대령의 독립 유격대대를 투입하여 유격대의 잔존 세력을 일소하기 위한 최후의 총공세를 감행한다. 이 결과로 3윌 12일부터 4월 12일간의 한달 동안 2,345명의 유격대가 사상하였고 1,608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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