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의 배경과 전개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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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의 배경과 전개과정
1948년 제 1공화국이 수립되자 제 1공화국의 정통성확보가 확립되지 못함으로서 이에 대한 저항과 체제위기로 인해 여순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의 발발배경과 원인을 엄밀하게 규명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여순사건이 직접적으로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의 반란으로 촉발되었지만 그것이 여수와 순천 그리고 인근 지방으로 신속하게 확산되었던 상황을 고려해본다면 당시 여순지역 일반주민들의 의식상태와 계급적 상황까지 분명하게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순사건의 발발원인을 기존 연구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여순사건의 명칭을 규정하는 개념도 이러한 입장에 따라 달라지게 됨은 물론이다.
첫째, 돌발적인 사건으로 보는 입장이다. 이것은 제주도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14연대의 일부 병력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자 좌익세력들이 반란에 대한 준비를 완벽하게 갖추기도 전에 돌발적으로 발생했다는 것이다. 남로당 중앙당에서도 미리 계획을 세웠다는 증거도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추후에 이를 수습하는 상황이었고 남로당 전남도당에서는 이에 대한 준비가 전혀 없는, 14연대의 독자적인 결정으로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는 주로 미군 쪽의 입장이다.
둘째, 압력분산설이다. 당시 제주도 유격대에 가해지고 있던 정부 당국의 압력을 분산시켜 제주도의 혁명을 성공시키고 이와 더불어 본토에 제 2전선을 형성함으로써 전국적인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 좌익세력들이 계획적으로 발발시켰다는 관점이다.
셋째, 미국의 결의 실험설이다. 이 것은 정치적인 요인에 더 많은 비중을 두면서 당시 반란을 남로당에서 세웠던 계획의 일환이라고 보는 것이다. 즉 미국의 개입정도가 어느 정도일 것인가를 시험해 보는 동시에 새롭게 등장한 대한민국정부의 정통성을 기초부터 흔들어 놓겠다는 일련의 봉기로 보는 입장이다.
1. 여순사건의 발발
이미 살펴보았듯이 1948년 전반기의 순천 여수지방은 전남도내 다른 지방에 비해 온건좌익 및 그 동조세력이 광범하게 존재하고 있었으나 상대적으로 남로당의 영향력이 미약한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1948년 5월 초에 광주의 4연대 1개 대대를 근간으로 하여 여수에 14연대가 창설되었는데, 이것이 여순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당시 전국 각 지역에서 벌어졌던 군과 경찰의 갈등으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열세에 놓여있던 군대 내에는 경찰에 반발하고 있던 사병들과 지창수를 비롯한 김지회, 홍순석 등 좌익계의 하사관과 장교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던 데다가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었던 좌익 동조자들과 일반 범죄자들까지도 경찰의 추적을 피해 쉽게 입대가 가능하였기 때문에 경찰에 대한 적대 감정이 높을 수 있었다.
이러한 14연대의 좌익세력들은 10월 들어 동요하고 있었다. 제주 4.3 사건 당시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11연대장 박진경중령의 암살을 계기로 미군정은 숙군작업을 시작하여 정부수립이후에도 계속 진행해오고 있었으며, 이는 여순사건 직전 14연대에도 파급되어 이미 전 14연대장이었던 오동기 소령도 이른바 혁명의용군 사건으로 구속되어 있었다. 숙군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정보를 알게된 김지회,지창수, 홍순석 등의 좌익세력들은 대단히 불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14연대내의 하사관과 사병들은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마다 모임을 갖고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 있었지만 별다른 대안이 있을 수 없었다. 10월에 접어들면서 이들의 모임은 더욱 빈번해지면서 그대로 숙군의 대상으로 당하기보다는 집단 탈영 등을 통해 목숨을 보존해야 한다는 등의 의견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집단행동을 할 때 여기에 동조할 수 있는 동조자가 얼마나 될 것인지가 불안한 요인이었다. 또 하나의 큰 불안 요인은 집단행동을 할 때 타지역의 군인들이 얼마나 가담해줄 것인지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아직은 입증되지 않았지만 좌익계열 인사들의 집단행동에 대해 남로당 전남도당에서는 아직 시기상조라는 견해를 제시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0월 15일 14연대장 박승훈 중령에게 육군총사령부로부터 제주도에 파견할 1개 대대를 조속히 편성하여 대기하라는 작전명령이 내려왔다.
연대참모부는 즉시 작업을 개시하여 이튿날까지 1개대대의 편성을 마쳤다. 14연대에는 미군으로 부터 신식무기와 풍부한 탄약 폭탄이 지급되어 있었으며 무기고에는 반납해야할 3000여정의 구식무기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제주도로 파견할 1개 대대를 편성하는 과정에서 14연대내에서 문제성을 갖고 있는 다수의 병사들이 주로 차출되었으며 숙군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병사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지창수와 장락현은 포함되지 않았었다. 이러한 편성작업은 극비리에 진행되었으나 연대본부의 인사담당 선임하사관이었던 지창수는 이러한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었으며 이것은 곧바로 좌익성향의 하사관과 병사들에게 알려졌다.
지창수는 곧바로 10월 16일 밤 긴급히 남로당과 연결되어 있거나 이승만정권에 불만을 품고 있던 하사관 그룹을 소집하여 대책을 논의하였다. 상당수의 참가자들이 선상반란을 찬성함에 따라 지창수는 남노당 전남도당의 연락책임자와 연결을 하여 선상반란의 계획을 밝히고 도당의 긴급지시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시 남노당 전남도당은 당시 경찰의 탄압 때문에 거의 와해된 상태에 있었고 결국은 도당에까지 보고되지 못함으로써 지창수 중심의 14연대 좌익세력들의 단독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남로당 세력들이 반란을 모의하고 있는 시각에 장교들은 장교식당에서 출동장교들의 환송을 위한 환송파티가 열리고 있었고 이는 저녁 7시경 끝났다. 출동부대 장교들은 대대본부에서 승선시간을 기다리며 쉬고 있었으며 연대장과 부연대장 등은 부두의 승선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여수항으로 나가 있는 상태였다. 이윽고 10시 10분전쯤에 비상나팔 소리가 울리자 연병장에는 출동부대와 잔류부대의 전대원 2700여명의 장병들이 집결하였다. 출동부대는 출발이 한시간 앞당겨진 것으로 생각하고 연병장에 모여 총기의 지급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갑자기 지창수가 연단으로 뛰어 올라가 지금 경찰이 우리한테 쳐들어온다. 경찰을 타도하자.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 우리는 조국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원한다. 지금 조선인민군이 남조선해방을 위해 38선을 넘어 남진중에 있다. 우리는 북상하는 인민해방군으로서 행동한다는 등의 선동을 하자 대부분의 사병들이 옳소하면서 찬성을 하였고, 이를 반대한 3명의 하사관은 즉석에서 사살되었다. 이로써 14연대 반란은 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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