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4.3사건! 레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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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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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미군진주와 친일파 등용
제주도 4.3 사건의 배경
광복 후 제주 인민위원회 구성하여 자치활동을 전개
그러나 미군정은 인민위원회를 인정하지 않고 이러한 상황에서 친일일사를 등용
이 과정에서 지역 주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음
다시 친일일사를 등용한 미군정에 대한 반감
진실을 밝힘과 동시에 희생당하신 분들에 대한 사과 필요
우리가 나아가야할 방향
제주 사람들은 많은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 아버지,내 엄마가 왜 억울하게 죽창에 찔려서 폭포 밑으로 내동댕이쳐지고,왜 우리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지 물으면 안 되었는지 알고 싶었고, 그 일에 대해서 진실과 사과를 받고 싶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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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직후 제주도에서는 건국준비를 위하여 인민위원회를 만들고 자치활동을 전개함.
제주 인민위원회는 제주 특유의 공동체적인 삶을 바탕으로 좌우의 이념 대립 없이 항일 운동가들에 의해 주도되어 지역주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음. 미군정과의 협조도 잘 이루어짐.
그러나 미군정에 의해 인민위원회의 힘이 약화시키려고 함.
그 과정에서 친일인사를 등용.친일인사를 다시 등용한 미군정에 대한 반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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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4.3사건의 전개 과정
1948년 4월 3일 김달삼을 중심으로한 무장대가 12개의 지서와 우익단체에 대한 공격을 함으로써 4.3 사건이 시작됨. 공격의 명분으로써 경찰의 과잉탄압 중지와 단선.단정이 아닌 통일정부의 수립을 주장함.
4.3사건이 일어나자 미군정은 서북청년회와 경찰을 투입하여 조기 진압하려 하지만 진압이 쉽지 않자 경비대에게 강경압을 명령.
사건 진압 사건을 맡은 9연대의 김익렬 중령은 극우세력의 횡포로 이러한 상황이 일어난 것으로 판단, 4월 28일 무장대와 평화협상을 체결함.
그러나 5월 1일 우익 청년단에 의해 오라리 방화사건과 5월 3일 기습사건으로 평화협상 겨렬, 그리고 김익렬 중령이 해임됨.
김익렬 중령의 해임으로 5월 6일 후임으로 박진경 중령 부임. 5월 10일 총선거가 실시되나 제주도 선거구 2곳이 과반수 미만으로 무효처리.
박진경의 강경진압으로 폭도가 아닌 사람도 폭도로 몰리게 되자 제주도민의 반감 더욱 심화 결국 6월 18일 박진경은 자기부하로부터 암살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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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삼이 포함된 무장대는 지하선거와 해주대회 참여로, 이승만 세력은 정부수립에 집중합으로써 잠시 소강국면에 접어듬.
그러나 10월에 오면서 토벌이 강화. 육지에 있는 군대를 제주도로 급파. 이 과정에서 여수의 14연대가 반기를 일으키면서 여순사건이 터짐.
11월 17일 계엄령 선포. 새로 부임된 송요찬 9연대장은 해안선 5km 이상에 거주하는 사람은 폭도로 간주해 무조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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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이후 중간산 마을을 초토화 시키는 대대적인 강경진압작전 전개
그 외에도 봉개리, 아라리, 노형리, 가시리 등 마을에서 학살이 이루어짐.
초토화 작전으로 무장대 세력약화. 식량을 구하고픈 무장대와 토벌대로부터의 처벌을 피하고 싶은 주민들간의 갈등. 결국 무장대에 의한 학살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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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 설치.
1949년 6월에 무장대 총책 이덕구의 사살로 사실상 무장대 궤멸.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요시찰자 및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검거되어 예비검속으로 집단 학살 당함.
1954년 한라산 금족 지역이 개방됨으로써 제주4.3사건이 끝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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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민들의 한라산 하산모습.
1954년 한라산 금족 지역이 개방됨으로써 제주4.3사건이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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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10세 이하 어린이(5.8%·814명)와 61세 이상 노인(6.1%·860명)이 전체 희생자의 11.9%를 차지하고 있고, 여성의 희생(21.3%·2,985명)이 컸다는 점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은 과도한 진압작전이 전개됐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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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보여주고 어떠한 내용인지 설명 ㄱ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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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사건에 의한 사망, 실종 등 희생자 숫자를 명백히 산출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본 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 수는 14,028명이다. 그러나 이 숫자를 4·3사건 전체 희생자 수로 판단할 수는 없다. 아직도 신고하지 않았거나 미확인 희생자가 많기 때문이다. 본 조사에서는 여러 자료와 인구 변동 통계 등을 감안, 잠정적으로 4·3사건 인명 피해를 25,000~30,000명으로 추정했다. 1950년 4월 김용하 제주도지사가 밝힌 27,719명과 한국전쟁 이후 발생된 예비검속 및 형무소 재소자 희생 3,000여 명도 감안된 숫자이나, 향후 더욱 정밀한 검증작업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본 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의 가해별 통계는 토벌대 78.1%(10,955명), 무장대 12.6%(1,764명), 공란 9%(1,266명) 등으로 나타났다. 가해 표시를 하지 않은 공란을 제외해서 토벌대와 무장대와의 비율로만 산출하면 86.1%와 13.9%로 대비된다. 이 통계는 토벌대에 의해 80% 이상이 사망했다는 미군 보고서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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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는 같은 날에 제사를 지내는 집들이 많습니다.그것은 바로 제주 4.3사건 당시에 한번에 학살된
집들이 많기 때문입니다.특히 한 동네가 몽땅 한날한시에 끌려가서 죽었던 일은 제주에서는 너무도
흔한 사건이라,제사를 한꺼번에 마을 전체가 지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주에는 유명한 관광지가 많습니다.그런데 이런 관광지마다 제주도민들에게는 너무나 아픈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정방폭포,다랑쉬오름만해도 그 안에 유골과 시체가 겹겹이 쌓였던 곳입니다.
문제는 제주도민들은 이런 아픔의 역사를 그동안 소리 내지도 못했었습니다.제주에서 축제를 하며
즐겁게 웃다가,죽은 사람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 통곡을 하자,경찰이 출동했던 과거의 역사는
제주도민이 얼마나 한과 설움을 가슴에 담고 말도 못했는지를 알려줍니다.
제주도 4.3사건 희생자는 빨갱이였기에 누가 왜 죽었는지를 자손들에게 알려주지 않았습니다.그러나
그들은 빨갱이도 아니고,지식층도 아닌 그저 평범하게 살았던 양민이고,순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주인들에게 제주 4.3사건은 단순한 역사가 아니라,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형제가 왜 죽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빨갱이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피맺힌 절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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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4.3사건 희생자는 빨갱이였기에 누가 왜 죽었는지를 자손들에게 알려주지 않았습니다.그러나
그들은 빨갱이도 아니고,지식층도 아닌 그저 평범하게 살았던 양민이고,순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차별적인 집단 살상 자행을 자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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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제주 4.3 사건을 새로이 밝힐 필요가 있고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정부는 이 불행한 사건을 기억하고 교훈으로 삼아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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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사람들은 제주 4.3사건에 대해 흉하다고 이야기를 잘 하지 않습니다.그것은 그들에게 제주
4.3사건은 숨겨야만 했던 과거이고,숨길 수밖에 없는 아픔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주는 타지역에 비해 마을 사람들이 함께 살고 어려움을 함께 이겨내던 순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주 4.3사건 당시에 서로를 죽여야 하고,마을 사람끼리 고발을 해야 살아남았습니다.
아픈 역사는 아직도 제주에 남아있습니다.그런데 오히려 외지에서 들어온 가해자들은 제주 4.3사건이
빨갱이들이 벌인 일이라고 법원에 계속 제소를 하고 패소를 했습니다.
간 영령들도 잠들지 못했지만, 반세기가 넘도록 붉은 화산섬 제주땅도 평화를 잃어왔다. 넋을 위로하고 추모하기에는 아직도 제주4.3은 슬픈 현재진행형이다. 산천을 떠돌며 살아있는 자들을 향해 통곡하지만, 애달픈 우리들의 억울한 죽음을 해원해 달라고, 왜 우리가 죽어갔는지,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밝혀 달라고 몸부림치는 영혼의 목소리를 듣지만, 아직도 역사는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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