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지 장군 의제 2 차석 국정 벌 배경과 그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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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지 장군 의제 2 차석 국정 벌 배경과 그 영향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 고선지 장군의 제2차 석국 정벌 배경과 그 영향 §
1. 고선지 장군과 아랍 연합세력과 탈라스 전투 배경
고선지가 석국 정벌의 성공 대가로 장안에서 새로운 관직을 추가로 받은 지 얼마 안 되어, 다시 그는 서성으로 출정하였다. 고선지 장군이 또 서역으로 출정하게 되었던 이유는 석국 왕자의 노력으로 사라센 제국이 중심이 되어 서방 여러 국가가 연합하여 안서사진에 도전하였기 때문이다. 즉
고선지에 의해 석국 왕이 포로가 되자, 요행히 석국 왕자는 도망쳐 나와 여러 나라로 돌아 다니며 고선지가 기만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섭게 노략질하였다는 사실들을 낱낱이 알렸다. 그러자 여러 나라들은 모두가 분노하여 대식군과 함께 안서사진을 공격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듣자 고선지는 번·한의 무리 3만을 거느리고 대식을 공격하기 위하여 7백여 리 나 깊숙이 들어가 달라사 성에 이르러 대식과 마주쳤다. 서로 닷새 동안 대치하였는데, 이때 갈라록 부중이 반란한 틈을 이용하여, 대식군이 당군을 협공하자 고선지가 대패를 당하였다. (이때 고선지의) 사졸은 거의 다 죽거나 포로가 되었으며, 살아남은 자는 수천 명에 불과 하였다.
라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동서 교섭사에서 주목을 받았던, 탈라스 강 서쪽의 탈라스 성에서 고선지 부대와 사라센 제국을 주축으로 한 연랍군의 싸움에 관한 『자치통감』의 기록이다.
위의 기록은 천보 10년(751) 7월말쯤부터 5일간 당나라 군대와 아랍·서방 연랍군이 탈라스에서 전투하였다는 내용이다. 또 이를 750년 우마이야 왕조를 멸망시킨 압바스 왕조의 이슬람 군이 당과 격돌한 탈라스 전라고 부른다. 그런데 강락은 무슨 이유인지 천보 8년의 사건이라고 하였다. 아무튼 이는 강락의 실수인 듯싶다.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면, 고선지 장군이 석국 정벌을 완수하고 장안에 입조하여 현종으로부터 개부의 동삼사를 제수받고 난 후, 반년정도 지난 뒤에 발생하였던 사건이다. 그런데 이 전쟁은 당과 아랍 연합 세력간의 최초의 전쟁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두환의 『경해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인디애나 대학교수 크리스토퍼 베크위즈의 주장처럼 아틀라(Atlah)전투는 아랍과 중국 사이의 최초이자 마지막 대결로 중요한 싸움이었다. 정확히 아틀라 전투의 의미는 동서 교섭사에서 더욱 중요하다고 보아야 옳다. 고선지 장군이 지휘하였던 당나라 군대가 아랍 연합 군대와의 회전에서 당한 참패는, 오렐 스타인의 주장을 빌리지 않더라도 케르룩 부중의 반란이 결정적이었다는 사실에 의심이 없다.
이와 관련된 사실은 『신당서』의 석국전에 기록된,
석국왕자는 대식으로 달려가 군사 지원을 요청하여, 달라사성을 공격하여, 고선지 군대를 패퇴시켰다. 이후로 석국은 대식을 섬겼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고선지의 부장이었던 한족 이사업의 열전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였다고 표현할 정도로 일치한다.
우선 석국 왕자가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 달려간 대식은 흑의대식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석국 왕자의 요청으로 말미암아 흑의대식을 주축으로 한 아랍 연합국이 달라사성으로 달려가 고선지가 지휘하는 당군을 포위하였다. 그런데 이후 석국이 대식의 속국이 되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중앙아시아에서 당의 역할을 대식이 대신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를 광의로 표현한다면, 서역제국이 공동 군사 동맹을 취하여 당군의 공격을 좌절시켰던 최초의 사건이다. 그런데 흑의대식이라는 표현은 그들 모두가 흑색을 소중하게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관복이나 군기까지 온통 흑색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앞서 언급한 사실은 석국 정벌에 대한 소문이 나자, 석국 왕은 용맹한 데다가 지혜로운 장군으로서 토번 정벌을 성공적으로 이끈 안서 절도사 고선지였기 때문에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당군에게 패배하였다. 고선지의 제1차 석국 정벌 이후 당의 조정은 천보 10년 정월 이후 장안에서 항복한 석국 왕을 궐하에서 죽임으로 서역정책은 실패를 자초하였다. 이와 같이 졸렬하기 짝이 없는 일이 서방세계로 알려졌다. 당의 행동은 서역 여러 나라의 격분을 샀다. 여기서 지나칠 수 없는 사실은 누가 석국 왕을 죽였는가 하는 사실이다. 『자치통감』은 “고선지가 천보 9년 12월에 서국을 정벌하고 석국 왕과 석국의 포로들을 끌고 와서 노약자까지 모두 죽였다”고 애매모호하게 기록ㅎ여 마치 고선지가 석국왕을 죽인 것 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다. 그리고 『신당서』는 석국 왕이 천보 9년에 고선지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처럼 기록하였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 말미암아 스튜어트 레그(Stuart Legg)도 고선지 장군이 석국 왕을 죽였다고 단정하였다. 그런데 석국 왕을 누가 죽였는가는 고선지 장군의 사람됨을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그런데 당에 항복한 나라의 왕은 응당 당의 장안으로 보내 졌다. 이러한 관례에 따라 고선지는 석국 왕을 장안의 개원문까지 호송하였다. 따라서 당은 이러한 포로의 처리를 황제의 시혜라는 형식을 빌려 사면하였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당 조정은 석국이 번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석국왕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 왕을 살해하였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벽화여, 고구려를 말하라 전호태 사계절 2004
벽화를 꿈꾸다 이종수 하늘재 2011
중앙아시아 속의 고구려인 발자취 지배선 외 6명 동북아역사재단 2008
옛 문헌속 고구려 사람들 이명학 2005 성균대학교출판부
유럽문명의 아버지 고지선 평전 지배선 청아출판사 2002
고분벽화로 본 고구려 이야지 전호태 풀빛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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