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와 포스트모더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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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푸코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노동시장론
Burrell, Gibson. 2006, "Foucauldian and Postmdern Thought and the Analysis of Work" in Korczynski, Marek, Randy Hodson and Paul Edwards. (eds.), Social Theory at Work, Oxford University Press. pp.155-181.
이 책의 기획은 특정 유형의 사회이론이 노동 분석에서 차지하는 역할에 있어서 중대한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때 푸코의 논의든 포스트모더니즘이든 그리 환영받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필자는 1987년 ASQ에 푸코에 관한 글을 투고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다. 물론 그 글은 이듬해 다른 저널에 실렸지만, 푸코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거부감은 여전했다. 그렇다면 지난 20년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1. 계약조건(Terms of Engagement)
이 장을 시작하기 전에 몇 가지 문제들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첫째, 푸코는 그 자신을 포스트모더니즘과 연관짓지 않았으며, 그런 말을 공개적으로 한 적도 없다. 둘째, 이 글에서는 ‘포스트’와 ‘모던’을 이어붙임에 따라 발생하는 문제, 그리고 시기구분의 문제는 다루지 않을 것이다. 셋째, 포스트모던이 근대 이후의 무언가를 의미하지 않는다면, 시기구분과는 별도의 개념규정이 필요한데, 이 글에서는 ‘인식론적 전환’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넷째, 포스트모더니즘이 철학의 한 형태와 관계된다면, 그것이 ‘노동’의 분석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밝힐 필요가 있다. C. P. 스노우의 ‘두 문화’ 논의를 참조할 때, 포스트모더니즘이 자연과학이 아니라 ‘문화적’ 영역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른바 ‘정상적’ 자연과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반대편에 선다. 이를 노동과 관련지어 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생산 조직’보다는 ‘조직의 생성’에 방점을 둔다고 볼 수 있다. 다섯째, 포스트모던적 전환이 경제적 생산과 노동보다는 철학, 소비, 여가에 보다 많은 관심을 둔다는 점은 분명하다.
2. 포스트모던과 노동 분석
노동과 관련하여 포스트모던적 영향을 받은 텍스트들은 많이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포스트모던 개념에 대한 철학적 접근을 취한다. 포스트모던 분석틀을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포괄한다. 첫째, 료따르의 (Lyotard, 1984)으로부터 제기된 하나의 축, 둘째, 자아 개념에 초점을 맞추는 ‘정체성’의 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또다른 축, 셋째, 해체, 넷째, 푸코의 통찰로부터 도출된 문제설정이 그것이다.
1) 료따르는 포스트모던을 거대서사에 대한 불신으로 특징짓는다. 맑스주의가 노동의 사회적 이론의 정향에 큰 영향을 미친 것도 그것이 제공하는 서사에 기인한다. 예컨대 브레이버만(Braverman, 1974)은 노동의 발전과정을 ‘노동의 쇠퇴’라는 명확하고 흔들림 없는 서사로 제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서사는 진보, 계몽, 기술의 지배를 중심으로 하는 근대성에 갇혀 있다. 소비에트 맑스주의가 그 내적인 동력으로부터 곤경에 처하게 되는 것을 보면서, 료따르는 계몽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는 과학이 단일한 (대문자) 진리가 아니라 부분적인 진리들을 생산한다고 지적하며 거대서사의 탈중심화를 주장하였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이 그 자체로 포괄적인 이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탈산업사회론(Bell, 1972), ‘제국’(Hardt and Negri, 2000), 역사의 종말(Fukuyama, 1992) 등의 경우에서 거대서사의 탐색을 엿볼 수 있다. 그럼에도 포스트모더니즘은 통합적 이론에 대한 불신을 보여 왔다. 이에 대해 ‘우리가 그렇게 비관적이고 회의적으로 되어야 할 이유가 대체 뭐냐’는 문제제기가 있는데, 포스트모던적 시각은 바로 그 ‘우리’라는 개념을 의심한다.
2) 정체성에 관한 논쟁은 그것이 ‘이드(id)라는 실체’로 여겨져 온 기존의 정체성 개념에 대한 문제제기로부터 시작되었다. 예컨대 스튜어트 홀(Hall, 1996)은 “정신분석의 영향을 받은 문화비평과 페미니즘의 담론 속에서 주체성과 그 무의식적 형성과정에 대한 문제제기가 발전해 왔다”고 지적한다. 중요한 것은 정체성의 창출이 언제나 그 조건들의 영향을 받으며 상황의존적이라는 문제의식이다. 이에 따르면 노동에 있어서의 정체성, 그리고 노동을 통한 정체성 확보라는 것(노동의 중심성)은 매우 문제적인 개념이 된다. 자아(the self)를 방어할 거대서사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이 분야의 핵심 연구자는 맨체스터 공대(UMIST)의 나이츠와 윌모트(Knights and Willnott, 1989; 1990)인데, 이들은 정체성을 문제삼는 연구 프로젝트들을 꾸준히 진행해 왔다. 더구나 이들이 초점을 맞춰 온 노동과정론에서는 그간 주요한 한계로 주체행위, 주체성, 저항에 대한 논의의 부족에 따른 ‘주체의 실종’이 지적되어 왔다. 케이시(Casey, 1995) 또한 자아와 정체성에 관한 경험적 연구를 시도하였는데, 특히 노동자들을 투항하도록 이끄는 기제로서 기업문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와 유사하게 두 가이(du Gay, 1996)는 ‘기업가적 주체’에 대해 말하면서 자본주의적 기업에 보다 적합한 정체성을 지닌 새로운 자아들의 창출의 문제를 강조한 바 있다. 물론 산업사회학자들은 이러한 논의들이 노동자의 ‘의식’이라는 범주를 불안정하게 한다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들은 정체성을 고정적이고 안정적인 분석대상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3) 텍스트에 외부는 없다는 말로 요약되곤 하는 해체의 문제로 옮겨가 보자. 로즈노(Rosenau, 1992)는 ‘모든 것이 텍스트이기에 해체의 활용은 무제한적’이라고 지적한다. 종종 부정적인 논평들은 해체론자들이 반방법론자들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해체는 이따금씩 매우 주관적인 것일지라도 하나의 ‘방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해체는 보편적 지식 또는 전체적 이론을 거부하는데, 좋은 이론과 나쁜 이론의 제도적 위계 자체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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