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양명학의 표상 하곡 정제두

 1  한국 양명학의 표상 하곡 정제두-1
 2  한국 양명학의 표상 하곡 정제두-2
 3  한국 양명학의 표상 하곡 정제두-3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한국 양명학의 표상 하곡 정제두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한국양명학의 표상, 하곡 정제두
2
■목차
머리말
Ⅰ 정제두의 생애
Ⅱ 하곡의 양명학 이해
ⅰ 마음이 곧 이치이다 - 심즉리(心卽理)
ⅱ 지행합일(知行合一)
맺음말
참고문헌
-머리말-
조선시대는 정주程朱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 정호(程顥)ㆍ정이(程) 형제와 주희를 아울러 이르는 말.
의 학문만이 행세하고 정주의 학설에만 의존했던 유교적 교육체제와 의식구조 아래에서 전개되었던 시대였으며 주자학 이외의 학문을 논하기 어
려운 상황이었다. 하곡 정제두는 특히 당쟁과 학문이 서로 얽혀서 혈투하던 조선조 후기에 살면서, 특이하게도 바로 그 정주학이 이단시하고 배척하던 양명학을 신봉하고 이를 저술로까지 남겼던 인물이다. 이처럼 경직된 학문 풍토에도 불구하고, 당시로서는 불교 다음으로 가장 큰 배척대상이었던 양명학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학문체계로 발전시킨 하곡 정제두를 알아보고자 한다.
Ⅰ 정제두의 생애
정제두의 호는 하곡霞谷이고 자는 사앙士仰이다. 그는 정몽주의 11대 손으로 태어나 인조 27년부터 영조 12년까지 88세의 생애를 살아간 조선 중기의 학자였다. 정제두가 어떤 경로를 통해 양명학을 알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주 젊은 시절부터 그는 양명학에 심취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래 정제두는 24세 무렵까지 여러 차례 초시에 합격하고서도 대과에 들지 못하였다. 연보에 따르면 그는 어머니께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학문에만 몰두하겠다고 청을 드려 허락을 얻은 다음 일생토록 학문에만 전념하기 시작하였다. 그 무렵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 큰아버지, 큰집 맏형과 맏조카의 연이은 사망으로 가문이 점점 기울어 갔고, 23세 때에는 첫 부인과 어린 아들마저 잃었으며 게다가 자신마저 깊은 병이 들고 말았다. 또한 32세 때인 1680년에는 기득권을 굳히기 위해 서인이 남인을 몰아낸 경신대출척을 겪었고, 35세 때인 1683년에는 남인들의 숙청 문제를 놓고 서인이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린 노소분당을 겪었다. 그 이후에는 평소 정제두와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이 양명학에 빠진 정제두를 바로잡기 위하여 논쟁을 벌여 갔다. 40세 무렵 서울 생활을 마감하고 안산으로 거처를 옮기기 직전부터 논쟁이 시작되어 다시 60세 무렵 강화로 거처를 옮기기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정제두가 서울 생활을 정리하는 것이나, 더 나아가 안산 생활을 정리하고 강화로 들어간 것도 이 논쟁의 진전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