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공간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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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해방공간의 시
1. 들어가며
8.15해방은 한민족에 있어서, 형언 할 수 없는 혼란으로 규정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혼란의 원인들은 점령군과 한민족 각각에게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있어 민족 해방투쟁세력은 크게 북만주 중심의 김일성의 무력투쟁, 태항산 중심의 조선독립 동맹의 무장투쟁, 임시정부, 국내에서의 건국동맹 등 네 가지로 파악되고 있는데, 8.15해방공간에서는 이런 민족해방투쟁의 중심세력들은 그 정당한 힘의 중심을 잃고 새로운 상황 앞에 힘의 재편성을 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힘의 재편성 과정이 곧 혼란이라 할 수 있으며, 그 혼란의 기간이 해방공간 3년에 걸쳐 있는 것이다. 물론 3.8선을 가운데 두고 미 소 점령군 쪽에도 혼란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미 소 점령군 쪽은 각각 냉전체제를 향한 그들 외교노선의 논리 틀 속에서 점령 정책 수행상의 혼선이었음에 비해 한 민족의 그것 즉 혼란은 논리이전에 심정적 측면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형국이었다. 미 소 점령군과 한민족 사이에 벌어진 혼란, 갈등을 보여주는 지표중 하나로 문학을 들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체험의 직접성, 호흡의 급박성에서 시 장르가 일층 직접적이라 할 수 있다.
(1). 해방공간의 시
1) 해방 직후 시 장르와 현실 문제
해방기는 문학보다 정치에, 문학을 하더라도 이론 논쟁에 더 치중하던 시기였다. 문학이 민족을, 민중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문학의 효용성 여부가 가장 요구되던 시기가 해방 직후였던 것이다. 무기로서의 문학, 선전선동시의 가능성 여부가 실험되던 것도 이 당시 사회의 성격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시 양식 본래의 기능만으로는 해방 직후의 격동기를 감당할 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새로운 시 양식의 가능성이 모색되기도 했는데, 시의 서사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든지 시의 무기화 과정이 실천적으로 논의된 것도 이 시기이다. 이 당시 시에 나타난 서사화 경향과 무기화 경향은 전자는 ‘이야기 시’, 후자는 ‘선전 선동시’의 형태로 집약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해방 직후의 시 장르는 해방의 감격, 노동자, 농민의 현실, 부정적 현실에 대한 비판,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대한 열망 등을 적극적으로 표명하였다. 그러나 그런 다양한 제재의 수용만큼 그 구체적 창작방법이 뒤를 따라가지를 못했다. 그래서 생경한 주제의 나열, 이념의 표출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2) 해방 직후 현실의 시적 변용과 그 수준
1. 해방의 감격과 그것의 시적 형상화
8.15 해방은 식민지라는 굴레를 벗어난 환희와 기쁨의 순간이었다. 해방은 시인들에게 벅찬 감격을 주었고 그 엄청난 충격은 작가들에게 당대 현실에 대한 객관적 파악보다는 주관적 감격의 토로, 해방의 환희를 우선 노래하게 만들었다. 결국 8.15 초기에 대부분의 시들이 일제의 사슬에서 풀려 나온 데 대한 기쁨, 직설적인 흥분의 소용돌이 속에서 멀리 헤어 나오지 못하였다. ‘기념시’와 ‘낭독시’의 유행이 그것이다. 『해방 기념 시집』(1945), 『3.1기념시집』(1946), 『횃불』(1946), 『연각조선시집』(1947) 등 엔솔로지 형태의 기념 시집이 많이 발간된 것도 해방 직후의 열정을 수용해 나가는 데 한 몫을 담당 하였다. 결국 해방 직후의 시인들은 갑작스레 온 해방의 현실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써 나가야 할까 하는 대상에 대한 진지한 탐구와 방법론적 고민을 할 여유가 없었다고 하겠다.
2.자기비판문제와 민족 민중 현실에의 증언
해방은 엄청난 기대와 감격에 못지않게 절망과 비애를 우리 민족에게 안겨 주었다. 이 시대의 중요한 쟁점중의 하나가 일제 잔재의 청산 문제라 할 수 있는데 이는 곧 자기비판문제, 곧 친일파 숙청문제와 맞물려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자기비판 문제가 개인적으로나, 민족적 양심의 문제로 엄정히 다루어지지 못한 것이 해방 직후 현실이었다. 작가들 또한 엄정한 자기비판의 정신과 양심 문제를 구체적 작품을 통해 드러내 보이지는 못했다. 시 장르에서 희미하게나마 이용악, 오장환, 임화, 김상훈 정도가 시에 그 편린이 보인다. 시 장르의 경우 자기비판 문제는 주로 지식인이 갖는 나약함, 소시민성에 대한 자기반성 내지 부끄러움의 모습을 문제 삼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자기비판의 모습은 곧 임화가 주도한 ‘조선문학건설본부’ 계열의 시인 이용악의「시골사람의 노래」,「오월에의 노래」나 오장환의「어둔 밤의 노래」,「공청으로 가는 길」등으로 이어진다. 반면 ‘인민성’의 문학보다 계급적 당파성을 강조한 ‘프로예맹’ 계열의 박세영, 권환, 박아지 등은 자신의 내면문제보다는 친일파 및 민족 반역자 배격 문제를 그들의 작품에 즐겨 다룬다. 권환의「어서 가거라」,「노들강」,박세영의「민족반역자」,「너희들도 조선사람이드냐」,박아지의「들으시나니까」등이 그것이다. 또한, 해방 직후의 시가 주로 다룬 또 하나의 문제꺼리는 민족 민중현실에의 증언이다. 해방 직후의 민족, 민중현실의 문학적 형상화 작업에 많은 작가들이 매달려 있었음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시인으로 이용악, 오창환, 김상훈 등의 활약이 두드러진다고 하겠다. 이외에도 당대의 많은 작가들이 해방된 조국의 현실을 그들의 작품 속에 담아내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