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의 시적 흐름과 정신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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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950년대의 시적 흐름과 정신사적 의의
1.
1950년대를 둘로 나누어보자면, 1950년대 전반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존 그 자체의 문제가 급선무였던 시기이며, 1950년대 후반은 전후의 복구와 앞으로의 민족적 지향성을 확립하는 것이 과제였던 시기라고 하겠다.
민족이 해방되고, 1948년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수립되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당대인들의 마음속에는 통일에 대한 희망이 담겨 있었다. 허나 민족공동체적 이상이었던 통일은 625동란으로 인해 여지없이 해체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죽음의 공포와 굶주림 속에서도 생존을 위한 한국인들의 처절한 자기극복의 몸부림, 폐허화한 산업시설과 민족상잔의 정신적 불모성 속에서 1950년대는 시련이 가중될수록 이의 극복의지가 강화된다는 참담한 교훈을 묵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2.
1950년대 전반을 압도하는 시는 전쟁현장의 시였다. 전쟁현장을 직접 노래한 시집으로 이영순의 『연희고지』(1951), 장호강의 『銃劍賦』(1952), 김순기의 『용사의 무덤』(1953)등이 있다. 조지훈의 「多富院에서」는 대구 탈환을 위해 한 달 동안 아군과 적군의 엄청난 포화와 혈투가 끝난 다부원을 돌아보고 쓴 시로서 처참한 살육의 현장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 (교과 345p)
이 모든 희생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었으며, 한 하늘 아래 목숨을 받아 움직이던 생령이었으니 어찌 동포로서 인간으로서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인가. 해방 직후 원산에서 『凝香』필화사건으로 월남한 구상이 「焦土의 詩」를 노래한 것은 우연히 아닐 것이다.(교과 347p) 죽고 죽이는 전쟁의 가열함 속에서도 인간성을 회복하고 이를 지키고자 하는 실존적 몸부림이 전쟁체험의 시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공식적으로 이루어졌다. 민족적 절망의 탄식에도 남북의 대결과 분단의 고착화는 풀 길 없는 세기적 과제가 되고 말았다.
전쟁의 상처가 회복되던 시기 서정주는 「無等을 보며」를 통해 당대의 순수서정시파의 한 흐름을 대변하였다. 이와 같은 시적 삶의 자세가 현실을 외면한 도피적인 것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의 본령이 순수서정이라는 점에서 볼 때 1950년대의 시의 주류적 흐름은 김윤성정한모조병화이원섭 등의 전통적 서정시와 송욱전영경김춘수 등의 풍자적이며 주지적인 서정시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930년대 모더니즘의 감각과 기법을 보다 직접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1951년 피난지 부산에서 조직된 ‘後半期’ 동인들이었다. 「현대시와 메카니즘」「현대시의 실험」「초현실주의와 현대시」등으로 이어지는 김규동의 모더니즘시론은 청록파류의 보수적이며 정태적인 서정시에 대한 정면비판으로 시사적 의의를 갖는다. 하지만 교과 350p의 김규동의 「나비와 廣場」을 보면 스스로와 대결하려는 절박한 자의식을 엿볼 수는 있지만 거기에서 시적 공감보다는 메커니즘화된 관념의 지적 조작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은 실험적 의식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49년 박인환김경린과 더불어 동인시집 『새로운 都市와 市民들의 合唱』을 간행한 김수영이 1960년대에 이르러 1950년대의 모더니즘적 한계를 넘어서서 대표적인 참여시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거꾸로 1950년대 모더니즘 시운동의 양상을 반추해보는 근거가 될 것이다.
박인환과 김수영의 중간지대를 개척한 1950년대의 일상인의 도시적 서정을 노래한 것은 첫시집 『버리고 싶은 遺産』(1952)을 간행한 조병화였다.
‘후반기’동인을 위시한 모더니즘 계열의 시인들에 의해 ‘청록파’를 중심으로 한 서정시가 비판받았다고 하더라도 대다수의 작품들이 견지하고 있었던 것은 전통적이며 서정적인 시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