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들 비탈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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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나무들 비탈에 서다
* 황순원 문학 전개와 그 특성
오랫동안 글을 써 온 작가라고 해서 반드시 훌륭한 작품을 남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작품의 제작에 지속적 시간이 공여된 문학은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추어 더 넓고 깊은 세계를 이룰 가능성을 갖고 있다. 황순원이 우리에게 소중한 작가인 것은 시대적 난류(亂類) 속 에서 흔들림 없이 온전한 문학의 자리를 지키면서 일정한 수준이상의 순수한 문학성을 가꾸어 왔고 그러한 세월의 경과 또는 중량이 작품 속 에서 느껴지고 있다는 점과 긴밀한 상관이 있다. 장편소설로 만조(滿潮)를 이룬 황순원의 문학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시에서 출발하여 단편소설의 세계를 거쳐 온 확대ㆍ변화의 과정을 볼 수 있다. 그의 소설 가운데 움직이고 있는 인물들이나 구성기법 및 주제의식도 작품 활동의 후기로 오면서 점차 다각화 변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여러 주인공의 등장, 그물망처럼 얼기설기한 이야기의 진행, 세계를 바라보는 다원적인 시각과 인식 등이 그에 대한 증빙이 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다각화는 견고한 조직성을 동반하고 있으며, 작품 내부의 여러 요소들이 직조물의 정교한 이음매처럼 짜여서 한편의 소설을 생산하는 데 이른다. 그는 산문적, 서사적 서술보다 우리의 정서 속에 익은 인물이나 사물의 단출한 이미지를 표출함으로써 소설의 정황을 암시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이러한 묘사적 작풍(作風)이 단편의 특징을 장편 속에 접맥시켜 놓고도 서툴지 않게 하고 오히려 단단한 문학적 각질이 되어 작품의 예술성을 보호한다. 황순원의 작품들은, 소설이 전지적 설명이 없이도 작가에 의해 인격이 부여된 구체적 개인을 통해 말하기, 즉 인물의 형상화를 통해 깊이 있는 감동의 바닥으로 독자를 이끌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러할 때 그에 의해 제작된 인물들은 따뜻한 감성과 인본주의의 소유자이며 끝까지 인간답기를 포기하지 않는 성격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완결된 자기 세계를 풍성하고 밀도 있게 제작함으로써 깊은 감동을 남기고 있는 황순원의 작품들은, 한국 문학사에 독특하고 돌올(突兀) 한 의미의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다.
*전란의 상흔과 모순에 맞선 인간 중심주의 - 초기 장편들의 세계
6.25전쟁이 발발하기 넉 달 전인 1950년 2월, 황순원은 첫 장편 『별과 같이 살다』를 간행했다. 1947년부터 암콤, 곰, 곰녀 등의 제목으로 이곳저곳에 분재되었던 것에 미발표분까지 합쳐서 묶은 이 소설은, 그 중간 제목들이 말해 주듯이 일제 말기에서부터 해방 직후까지의 참담한 시대상을 통해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담으려 했다. 그의 장편소설로서는 유일하게 ‘곰녀’라는 한 여인을 주인공으로 설정하기도 했다. 1953년 9월부터 황순원의 「문예」에 새 장편 ‘카인의 후예’를 연재하기 시작했으며 우여곡절 끝에 집필을 완료하였다. 황순원은 1960년 1월부터 전란의 문제를 다룬 중요한 장편『나무들 비탈에 서다』를 『사상계』에 연재하기 시작하여 7월호에 완결하게 되는데, 이는 9월에 같은 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상재되었다.
카인의 후예는 해방 직후 북한에서의 토지개혁 및 지주계급이 탄압받는 이야기가 중심축이 되었는데 황순원의 가문의 자전적 요소들이 많이 내포되어 있으며, 그 일가가 월남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도 잘 내비치고 있다. 작품의 표제 ‘카인의 후예’는 두 가지 의미를 함께 끌어안고 있다. 카인은 성경에 기록된 인류 최초의 살인자이며 동시에 인류 최초의 곡물 경작자였다. 그러므로 ‘카인의 후예’는 곧 ‘범죄’와 ‘농민’이라는 중의법의 의미망을 함께 둘러쓴 이름이다. 북한의 농경사회에 불어닥친 인간성 파괴의 현장, 작가는 그것을 일종의 법죄행라고 본다. 잠시 카인의 후예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박훈은 평양에서 공부하는 동안 조부와 아버지의 사망으로 지주가 되었고, 도섭 영감은 이십여 년 동안 훈이네 토지를 관리해 온 마름인데 박훈은 마름의 딸 오작녀를 좋아해 왔다. 훈이 고향으로 돌아와 배우지 못한 소작인의 자식들을 위해 야학(夜學)을 운영하게 되자 오작녀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갔음에도 불구하고 훈의 집에 기거하며 그의 수발을 들어주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그러나 해방이 되어 북한 세력이 들어서면서 훈은 야학을 압수당하고, 도섭 양반은 마름을 한 과거를 묻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지주와의 관계를 끊으라는 군당부의 압력을 받아 토지 개혁 운동에 앞장을 선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대회가 열리고 지주인 박용제와 윤주사가 반동분자로 몰려 숙청(肅淸)을 당하지만 훈은 오작녀의 도움으로 숙청을 면한다. 그러나 딸의 소행으로 인해 훈의 토지를 갖지 못하게 된 도섭 영감은 훈의 할아버지 송덕비(頌德碑)를 도끼로 때려 부순다. 훈은 사촌 동생 혁을 통해 오작녀와 월남 계획을 세운다. 그는 순안으로 돌아오다가 도섭 영감이 주도했던 지난 농민대회 때 숙청당한 삼촌 박용제를 본다. 사동 탄광에 끌려 갔다가 탈출한 용제 영감은 트럭에서 몸을 날려 자살한 것이다. 오작녀와 순안을 떠나려고 했던 훈은 도섭 영감을 죽이기로 작정한다. 이즈음 아들 삼득이가 박용제 영감의 묘자리를 파 주었다는 이유로 도섭 영감은 농민 위원장 자리에서 숙청된다. 산으로 올라가 훈과 맞선 영감은 훈의 칼에 옆구리를 찔린다. 영감은 이에 낫을 휘두르나 항상 훈의 신변을 걱정해 미행해 오던 오작녀의 동생 삼득이 이를 저지하다가 상처를 입는다. 영감은 삼득과 실랑이를 하다가 살의를 버린다. 삼득이가 훈에게 오작녀를 데리고 빨리 떠나라고 말하자, 정신을 차린 훈은 오작녀와 함께 양짓골을 떠난다.
작가는 이들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서 변동하는 새 사회의 내막을 절실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그 시대상이 이들의 사랑을 한층 더 절실하게 하는 WK임새 있는 구성 기법을 사용한 것 이다. 이 두 줄기의 조화로운 결합이 이 소설을 1950년대 우리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밀어 올리는 힘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나무들 비탈에 서다』와 비교해 본 『움직이는 성』
산 작품 속에 집적되어 있는 여러 의미 가운데서 뜻의 요약과 뜻풀이를 위하여 하나의 주제를 추출해 내는 것은 절대적 가치가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의식의 흐름’이란 가술 방법에 의해 쓰여진 일부의 소설들처럼 주제를 확인하는 일자체가 무의미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형적인 창작법과 사실적인 표현 방법에 따라 제작된 소설에 있어서는 주제의 확인과 그에 이르는 과정이 작품의 가치를 판단하기 좋은 자료가 된다. 물론 황순원은 후자에 해당하는 작가이다. 근대사의 격동기를 거쳐 오면서 생산된 우리 문학에는 패배와 반항의 군상으로 그려진 많은 지식인들이 등장한다. 특히 전후 1950년대 작가들의 작품은 대다수가 그러하다 문학은 사회제도의 하나이며 그 매개 수단으로서 사회가 만든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들 비탈에 서다와 움지이는 성의 인물들을 대비시켜 보면 유익하다. ‘나무들 비탈에 서다’의 현태,동호,윤구는 ‘움직이는 성’의 준태,성호,민구와 포괄적인 의미에서 각기 동류 항으로 묶을 수 있다. 현태가 전란의 가혹한 현실 상황에 반발하는 허무주의자라면, 준태는 우리 민족의 심리적 기조인 유랑민 근성에 근거한 허무주의자다. 동호가 인간의 순수성과 고귀함을 지향하는 이상주의자라면, 성호는 기독교적 사랑의 실천을 추구하는 이상주의자다. 윤구가 혼란의 와중에서 물욕을 키워 가는 현실주의자일 때 민구는 본능적으로 이기심을 따라가는 현실주의자다. 이들의 이름 끝자가 서로 일치하고 있음은 작가가 보이는 작명법의 취향에 대한 암시일 수도 있을 것 이다. 이들 중 엄밀한 의미에서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허무주의자의 패배는 당연한 것이다. 현태는 극심한 자학에, 준태는 결국 죽음에 이른다. 이상주의자로서의 동호는 전란의 격랑 속 에서 동정을 버리고 자살밖에 택할 길이 없으며, 성호는 내면적 인격의 건실함을 잃지 않지만 사회적 의미의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현실주의자로서의 윤구와 민구의 삶은 속물적인 것으로의 전락이며 정신적인 패배자의 모습이다. 왜 이들이 모두 패배의 수렁으로 떨어져야 하는가를 밝히는 일은 곧 작품의 주제를 설명하는 것으로 되는데, ‘나무들 비탈에 서다’에서는 전란이 초래한 한국 사회의 윤리적 위기를 다루고 있으며‘움직이는 성’에서는 한국인의 근원 심성을 유랑민 근성이라는 비판적인 측면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작가가 이들의 패배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이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는 “인간을 아름답고 순수한 어떤 것으로 믿는 경향”을 지니고 있으며 그 때문에 문학사에서도 그를 낭만적 휴머니스트로 기록하고 있다. 주어진 운명이나 참기 어려운 상화에 대해 작가가 향일(向日) 작업의 반응 검사로 내세우는 것은 그것을 수락하고 감당하는 삶의 자세이며, 그것은 주로 작품의 말미에서 나타난다. ‘나무들 비탈에 서다’에서 동호의 애인 숙이 현태의 아이를 낳아 기르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전쟁의 상처를 “마지막까지 감당하기 위해서”이다. “일월”에서 기룡이 보여주는 현실 초월적 태도는 천생의 숙명과 가열한 고독감에 대한 수락과 감당을 의미한다. “움직이는 성”의 성호와 지연도 불행한 사람들의 생애가 남기고 간 아이들을 거두어 기르면서 사랑의 실천에 동역자가 되며, 남은 사람들의 진행 방향을 가리키는 전조등으로서 ‘장초누의 눈’이란 함축적인 알레고리가 제시된다. 이러한 사실들이 그가 인간의 정신적 아름다움과 존엄성에 대한 깊은 신뢰를 포기하지 않는 증거가 될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증거한 문학
황순원의 시와 초기 단편들, 그리고 순서가 앞선 장편들조차도 기실 우리가 두 발을 두고 있는 구체적 삶의 현장에 과감히 뛰어든 문학이 아니다. 그러나 소재적 측면에서 초기 이후의 단편, 그리고 단편에서 장편으로 넘어오면서 황순원의 작품에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격동의 사건인 6ㆍ25전쟁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1930년 열여섯에 시를 쓰기 시작하여 1992년 일흔여덟까지 작품을 쓴 황순원은 시 104편, 단편 104편, 중편 1편, 장편 7편의 거대한 문학적 노적가리를 남겼다. 이 작품들은 그로 하여금 한국 현대문학에 있어서 온갖 시대사의 격랑을 헤치고 순수문학을 지켜 온 거목으로, 그리고 작가의 인품이 작품에 투영되어 문학적 수준을 제고하는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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