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어] 고극공해석본 p 5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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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어] 고극공해석본 p 51~63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p 51~63

c. 고극공 (元 定宗3년(1248)~至大3년(1310))


본문내용
복고운동은 몇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梁啓超(양계초:1873~1929)는 『청대학술개론』중에서 청대의 복고는 「제1은 宋의 옛날로 되돌리고, 제2는 漢 ․ 唐의 옛날로 되돌리고, 정자와 주자로부터 해방되었다」, 제3은 前漢, 제 4는 先秦의 옛날로 되돌린다(二「청대 사조의 변천」)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그를 부연하자면 元明시대에도 해당된다. 중국은 어느 시대든지 보다 오래된 옛 시대를 찾아가려는 경향이 있다. 원대 회화의 복고에서 가장 근접한 시대는 北宋末 ․ 南宋 初이다. 조맹부도 실제로 조씨 일족의 청록산수형식에 촉발된 흔적이 있으나, 고극공(元 定宗3년(1248)~至大3년(1310))의 경우 분명히 미가산수형식을 작화의 근저에 두고 있다. 鄧文原(등문원:元 憲宗8년(1258)~致和元年(1328))이 찬한 고극공의 행상에 의하면 그의 선조는 서역인이고, 그는 定宗3년(1248)에 대도의 방산사람으로 태어나 至大3년(1310)대도에서 63세로 죽었기 때문에, 趙子昻(조자앙)보다 6살이 많고, 周密(주밀)보다 6살이 적으나, 한인도 남인도 아닌 훨씬 상위의 생목인이였다는 것은 朱德潤(주덕윤)이 『存復齋集(존복재집)』중에서 高侯는 위그르인이고, 수염이 긴 사람이다 라고 읊었던 점에서도 명백하다.
그가 강남에 도착한 것은 至元26년(1289), 江浙行省右司都事(강절행성우사도사)로서 江淮로 사신갔을 때의 일일 것이며, 그 후 行省左右司郞中(행성좌우사랑중)에 임명되었고, 至元31년(1294)에 左司의 임기가 끝난 후에도 무림에 살고 있었다. 그 무렵, 行省運使經略 李仲方(행성운사경약 이중방)의 장례식을 郭佑之(天錫)(곽우지(천석)), 李仲賓(衎)(이중빈(간)), 鮮于伯幾(樞)(선우백기(추)), 王子慶(芝)(왕자경(지))와 함께 하였고, 저명한 가 그려진 것도 이 무렵의 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