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중세정치] 샤를마뉴의 대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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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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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목 차 §

1. 샤를마뉴의 대관식 소개
2. 800년 대관식에 대한 다각적 의미
- 교황, 샤를마뉴, 로마인에게
3. 800년 사건의 영향
- 교황우월주의 vs. 황제우월주의

* 에필로그
* 더 생각해볼 문제
본문내용
Ⅰ. 샤를마뉴의 대관식

서로마 붕괴 이후 중세 초기의 혼란기에 서유럽인들은 분열된 지역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통합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이들의 과거 로마시대의 통일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강한 욕구가 현실로 표현된 것이 800년 샤를마뉴의 대관식 즉, 샤를마뉴가 800년에 로마 교황 레오3세로부터 황제로서 대관된 사건이다.
8세기는 교황이 종래의 황제교황주의라는 구질서에 탈피하고 그동안 형성해온 교황의 이념에 따라서 교황정치를 구축한 시기이다. 황제가 교황의 역할까지 겸하는 황제교황주의는 8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황제 정책의 본질적인 일부가 되어왔다. 그동안에도 교황은 꾸준히 교회질서를 수립하고 권한은 증대시켰으며 황제로부터 독립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해왔다. 이후 기독교가 제국의 공식종교로 인정받게 된 4세기부터 사도 베드로의 계승자로서 서방전체의 교회 내에서 최고의 권위를 수립하고자 하였으나, 6세기 유스타이우스의 시대까지도 현실적으로 교황은 비잔틴 황제의 교회 내에 속해있는 총대주교(patriarcha)의 지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 후 서방 교회 최고의 수뇌로서의 교황의 역할이 증가한 시기는 콘스탄티누스4세 때로, 황제로부터 지원을 받아 비로소 교황의 로마를 세우게 됨에 따라서이다.
교황의 권위는 증대되었지만 로마는 또 다른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8세기에 이르러 이탈리아 반도에 롬바르드 왕은 왕권을 과시하고 세력을 확장할 목적으로 라벤나시를 점령하고 로마에까지 위협을 가해왔다. 로마가 멸망할 위기에 처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교황 스테파누스2세는 비잔틴 정부에 원조를 요청하였으나 내부의 문제로 세력이 약화된 비잔틴으로서는 현실적으로 이탈리아를 구원할 수 없었고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교황은 다른 방도를 찾아야만 했었다.
교황은 당시 서유럽세계에서 급격히 팽창하는 세력인 프랑크인들에게 관심을 돌려 교황의 이념을 실현하는데 그들을 물리적인 힘의 보호자로 선택하였다. 다른 여러 게르만 왕국들이 대개 이단으로 지목받은 Arius파로 개종하였던데 비하여 프랑크인들은 정통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하였기 때문에 로마 교회와 호의 적인 관계를 형성해왔었기 때문이다. 또한 751년 피핀이 메로빙 왕조를 폐하고 카롤링 왕조를 창설하고자 하였을 때 교황이 새 왕조를 지지하여 쿠테타를 합법화 시켜주었다는 사실은 프랑크 세력을 교회의 후원자로 삼겠다는 교황의 의도가 담겨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