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답사] 분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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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답사] 분황사에 대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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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芬皇寺)는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에 있는 사찰이다. 분황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으로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로 편성되어 있다. 선덕여왕 3년인 634년에 세워진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불교가 크게 중흥했던 신라의 전성기와 함께 한 사찰이며 신라 고승인 원효와 자장이 거쳐가기도 했다. 원효는 이 곳에서 저술 활동을 하여 많은 저작을 남겼고, 원효 사망 후에 아들인 설총이 유해로 상을 만들어 이 곳에 봉안했다. 원효의 뼈를 부수어 만들었다는 이 고상은 고려 시대까지 분황사에 남아 있었다. 6세기에 먼저 지어진 황룡사와는 담을 맞대도록 바로 옆에 건축되어 황룡사지와 잇닿아 있다. 경주 신라 유적지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첨성대와 내물왕릉이 바로 서쪽에, 선덕여왕과 진평왕의 능을 비롯해 설총의 묘는 동쪽에 있다. 분황사석탑의 인왕상신라의 향가 〈도천수대비가〉의 배경에는 분황사가 등장한다. 분황사에 걸려 있던 천수대비의 그림에 영험이 있어, 신라 경덕왕 때 눈이 먼 아이가 그 앞에서 도천수대비가를 부르며 기도했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는 전설이 얽혀 있는 향가이다. 신라 화가 솔거가 그린 그림도 분황사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본래 규모가 큰절로서 많은 유물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고려 말 몽골 제국의 침략과 조선 시대의 임진왜란을 거치며 대부분 사라지고 지금은 작고 아담한 사찰이 되었다. 문화재로 국보 제30호 모전석탑을 비롯하여 화쟁국사비적, 삼룡변어정, 약사여래동상 등이 있다.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잘라서 쌓은 모전석탑은 본래 7층 또는 9층으로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아래 3층만 남아 있다. 우물인 삼룡변어정은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신라 원성왕 때의 호국룡 이야기에서 무대가 되는 곳이다. 이 우물은 외곽 바탕은 사각으로, 우물 외부는 팔각으로, 내부는 원으로 설계되어 철학적인 사상을 담고 있다. 화쟁국사비적은 원효의 비석을 받치던 비적으로 김정희의 글이 새겨져 있다. 신라 경덕왕 14년인 775년에 구리 30만근 이상이 들어간 거대한 약사여래동상을 조성하여 분황사에 안치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임진왜란 중 분실되어 현존하지는 않는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약사여래입상을 모신 보광전과 승당·종각 등이 있으며, 문화재로는 국보 제30호인 분황사석탑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인 화쟁국사비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인 석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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