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근세사상] 왕양명과 양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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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양근세사상] 왕양명과 양명학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왕양명(王陽明)의 출생(出生)

2. 왕양명의 주자학(朱子學)에 대한 문제의식

3. 양명의 사상

3-1.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지행합일(知行合一)

3-2. 천리와 인욕

3-3.양지를 통한 만물일체

4. 양명의 현실인식

5. 양명의 현실극복

5-1. 광기

5-2. 양명의 유토피아

6. 내면주의의 성과

7. 마치며

본문내용
1. 왕양명(王陽明)의 출생(出生)

왕양명은 본명은 수인(守仁)으로 절강성(浙江省) 여도(余姚)에서 1472년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가 진사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10세에 북경으로 이사하여 살게 된다. 그가 18세가 되던 해, 강서(江西)의 주자학자인 누인재(婁一齋)를 방문하여 반드시 학문을 통해서만 성인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침을 받는다. 이후 28세에 진사시에 합격해 관직에 올랐는데, 35세에 당시 권세를 누리고 있던 환관 유근(劉瑾)에 대한 반대운동에 참했다가 투옥되었고, 이 후 멀리 귀주성(貴州省) 용장역(龍場驛)의 역승(驛丞)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유배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곳에서 양명은 석실을 만들고 그 안에서 밤낮으로 정좌하여 명상에 잠겼고, 어느날 밤 홀연히 크게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의 깨달음은 다음과 같다. ‘성인의 도는 자신의 성정(性情)만으로 족하다. 종래 이를 여러 사물에서 구하려고 한 것은 잘못이다.' (주자학과 양명학 p 149) 이렇게 깨달은 때가 그가 37세였다. 환관 유근이 살해되고 다시 조정으로 돌아온 그는 당시 중국 각지에서 발생한 농민반란을 평정하여 군사전략가, 정치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이는 후에 적비토벌(赤匪討伐)의 철학자라고 비판받을 빌미가 된다.
이처럼 왕명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의 삶이 조용히 학문에 정진하는 삶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앞으로 살펴볼 양명학과 맥을 같이한다 할 수 있다.

2. 왕양명의 주자학(朱子學)에 대한 문제의식

양명이 살았던 시대는 이미 주자학이 그 위력을 떨치고 있어 더 이상 진리탐구가 아닌 주자학(朱子學)의 실천만이 문제 시 되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런 주자학도 양명이 보기에 분명 문제점은 존재했다. 이는 그가 주자학으로부터 학문을 시작했고, 양명학은 주자학을 넘어서고자 하는 학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그의 심즉리(心卽理)라는 원리는 주자학에 몰두했지만 한계에 부딪혀 찾아낸 새로운 원리라는 것이다.
양명은 주자학의 문제를 크게 세 가지로 밝힌다. 첫 번째, 주자는 격물을 해석하여 천하의 사물을 궁구한다고 했는데, 천하 모든 사물에 대해 궁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고, 또한 그것을 이루어 이(理)를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그것과 자신, 즉 ‘자신의 뜻을 진실되게 하는 것’과의 일치 문제가 남아있다고 한다. 두 번째, 만약 주자의 해석에 따른다면 내와 외(심과 물, 심과 이)는 궁극적으로는 관계가 없고, 또 무의미한 대립자가 될 뿐이다. 셋 째,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데, 주자의 격물설은 결국 ‘외’로 ‘내’를 보충한다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마음은 주체임으로 객체가 될 수 없는 것인데 사물(외)를 통해서 마음(내)가 채워진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양명의 주자학에 대한 이해가 올바른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여기서는 논외로 하겠다. 양명의 사상, 양명학의 출발점이 위와 같은 주자학의 문제점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