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문학] 이육사시인에 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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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시문학] 이육사시인에 관해서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 이육사에 대한 간단한 소개
♠ 백마 타고 온 초인, 이육사
♠ 광야
♠ 육사 시의 특징
♠ 육사의 생애가 현재에 주는 의미
♠ 발제를 마치며
본문내용
♠ 이육사에 대한 간단한 소개

호 육사(陸史). 본명 원록(源祿),활(活). 경북 안동(安東) 출생.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대구 교남(嶠南)학교에서 수학,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 1926년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 1927년 귀국했으나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때의 수인번호 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출옥 후 다시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입학, 수학 중 루쉰[魯迅] 등과 사귀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33년 귀국, 육사란 이름으로 시 《황혼(黃昏)》을 《신조선(新朝鮮)》에 발표하여 시단에 데뷔, 신문사 ·잡지사를 전전하면서 시작 외에 논문 ·시나리오까지 손을 댔고, 루쉰의 소설 《고향(故鄕)》을 번역하였다. 1937년 윤곤강(尹崑崗) ·김광균(金光均)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청포도(靑葡萄)》를 비롯하여 《교목(喬木)》 《절정(絶頂)》 《광야(曠野)》 등을 발표했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 이 해 6월에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인으로 목가적이면서도 웅혼한 필치로 민족의 의지를 노래했다. 안동시에 육사시비(陸史詩碑)가 세워졌고, 1946년 유고시집 《육사시집(陸史詩集)》이 간행되었다. (참고문헌: 네이버 백과사전)

♠ 백마 타고 온 초인, 이육사

육사는 짧은 40년 생애 동안 독립운동이나 문예활동에 있어 참으로 가시밭길을 걸었다. 민족문제를 해결하려고 국내외를 넘나든 그의 노력이나 고통 속에서 펼친 문예활동도 모두 민족에 대한 그의 애정에서 우러나온 것임은 더 이상 다른 말을 덧붙일 필요조차 없다. 그 짧은 인생을 정리하면서, 아직도 못다 푼 문제가 여럿 있다는 사실에 가슴 무거움을 느낀다. 베이징의 중국대학이라는 부분이나 쭝산대학 학적부의 더욱 자세한 해명이 필요하다는 엄연한 사실, 대구공청사건의 내용과 육사의 관련성, 그리고 베이징의 옥중기록등은 꼭 찾거나 풀어야 할 과제이다. 그의 일생을 간단히 되돌아보면, 짧은 한 편의 드라마이다. 그것도 고민과 번뇌로 지새운 한 지식인의 양심 역사이다. 역사와 전통을 조용히 감싸안은 고향마을, 안동 도산의 원촌. 그곳에서 어린 시절 한학을 배우며 자란 육사가 보문의숙과 도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로 이사간 뒤 부친의 엄명으로 일찍 결혼하면서 처가 마을에서 백학학원을 다니고 또 그곳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가문의 영향으로 민족문제에 일찍이 눈을 떳고, 일본에 1년 정도 유학하면서 그것이 더욱 굳어졌을 것이다. 귀국하여 대구에서 문화활동을 벌이던 육사는 베이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