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사] 1910년대 문학 -근대로의 과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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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현대문학사] 1910년대 문학 -근대로의 과도기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개관과 시 - 근대로의 과도기
1.1. 1910년대 근대시의 의의
1.2. 1910년대 근대시의 전반
1.3. 육당의 신지
1.4. 춘원의 시
1.5. 1910년대에서 1920년대로

2. 희곡 - 신파극시대의 희곡
2.1. 신파극의 도래
2.2. 1910년대 희곡작가들 - 조일재, 육백남, 이광수, 유지영
2.3. 3 ․ 1 운동 이후의 희곡

3. 소설 - 근대소설의 태동기
3.1. 유학생 세대의 고독한 목소리 - 단편소설의 형성
3.2. 역사인식과 시대모순 파악 - 신채호와 현상윤의 소설
3.3. 새롭게 탈바꿈한 장편 - 이광수와 무정의 양면성
3.4. 창조파 등장과 순수문예선언 - 김동인과 전영택의 소설

4. 비평 - 대표적 비평가와 비평세계
4.1. 이광수의 선구적 비평
4.2. 상징주의의 소개와 자유시의 개념형성 - 김억, 백대진, 황석유
4.3. 소설가로서의 비평 - 김동인의 형식주의적 비평
4.4. 현실과 개성의 조화 - 염상섭의 비평세계
4.5. 그 밖의 비평가들

5. 결론 - 마치며.
본문내용
1.2. 1910년대 근대시의 전반
1910년대의 신문, 잡지에는 많은 시가 발표되었고, 또한 과거 어느 때보다 형식도 다양했다. 과도기였던 만큼 시형과 주제 및 성격이 다른 여러 갈래의 시가들이 다채롭게 공존하였는데 한시, 가사, 시조, 사설시조, 언문풍월 1910년대를 전후해 풍미한 일종의 변종장르. 한시형식을 패러디한 장르로 한시양식 중 7언 절구 및 7언 율시형식을 그대로 차용하고 거기에 한자 대신 국문자를 사용한 순국문체 한시 형식의 독특한 양식.
, 민요, 창가, 신시, 자유시, 산문시 등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신시, 자유시, 산문시는 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식으로 이는 그 이전의 정형성에 대한 반명제이자, 자유시를 지향하고자하는 것이 틀림없다. 1910년대에 육당, 춘원, 소월, 안서 등은 이러한 형식을 빌어 정형적 음수율이나 반복적인 리듬에서 벗어나려 하거나 구어체의 사용 같은 실험을 행했는데 이는 과도기의 시적변모라고 할 만하다. 가령 육당은 「해에게서 소년에게」등을 통해 분련 및 음수율의 변화를 보여주었으나 각 연 대응행에 나타난 음절수가 일치하고 시상 또한 ‘바다’와 ‘산’ 등 객관적 등가물을 끌어들여 개인적이고 반사회적인 감각이 아니라 기성적이고 공적인 선험으로 일관되고 말았다. 소월, 안서, 유암 등이 『태서문예신보』 1918년 9월에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주간지. 1919년 2월 종간.
등에 발표한 시에서 보여준 개성적인 서정의 발견은 새로운 감정이지만, 그 리듬은 순전히 내발적인 것이 아니라, 서구시와 교접하면서 이루어진, 타설적인 것이었기에 엄격한 의미에서 이들 시를 근대적이라고 부르기는 힘든 것이다. 김윤식․ 김우종 외 34인, 앞의 책, p82~84.

1.3. 육당의 신시
1910년대 한국시단의 제1인자는 역시 육당 최남선으로 특히 신시는 그에 의해 최초로 제작, 발표되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육당은 자유율에 있어서 더 나은 정제작업을 계속하지 못하였고 급기야는 「태백산시집」이후에는 ‘시’라고 쓰인 작품들이 거의 산문화된 채 자기의 이념을 서술하거나 또는 거기에 수필적인 서경을 곁들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