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경제사] 7.8장 소련의 대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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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소련경제사] 7.8장 소련의 대도약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7. 소련의 대도약: Ⅰ. 집단화

갑자기 경고도 없이

계급으로서의 꿀라끄 청산

강압과 일시적 후퇴

공격이 재개되다

1932~33년의 위기

당통제와 MTS

일부 통계들

8. 소련의 대도약 : Ⅱ. 공업 ․ 노동 ․ 재정

낙관론이 만발하다

제1차 5개년계획의 성과

노동문제

인플레이션 압력

가격, 세금, 구매력

유인동기와 불평등

성장을 위한 재원 조달

계획의 재조직

당의 규칙과 방식

건전한 제도로의 복귀


본문내용

계급으로서의 꿀라끄 청산
꿀라끄는 부농계급을 뜻하며 탈꿀라끄화는 사실상 이전부터 지방 당간부들의 즉흥성과 반쯤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약탈행위 비슷한 것이 뒤섞여 진행되고 있었지만, 스탈린은 1929년 12월 말 꿀라끄를 집단농장의 형성․발전 과정에서 ‘철천지원수’로 지목하고 ‘꿀라끄를 계급으로서 청산'하자는 신념을 정당화하였다. 집단체는 꿀라끄에 의해 지배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그들의 가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꿀라끄에 의해 생산․판매되던 곡물을 이제 집단농장과 국영농장들이 생산하고 판매할 수 있었으므로,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집과 땅을 잃게 되었고 1929년 말경 일부 지역들에서 시작된 꿀라끄의 추방은 1930~31년에 절정에 달하였다. 가족들은 흩어지고 아이들은 방치되었으며, 수천명의 사람들이 식량도 물도 거의 없이 열차에 실려 시베리아로 보내졌다.
집단화는 탈꿀라끄화와, 탈꿀라끄화는 반쯤 위장된 강탈행위와 나란히 진행되었다. 빈농들은 계급투쟁의 이름으로 또는 아무런 구실도 없이 자기 이웃들의 물건을 빼앗았으며, 또한 분명한 사실은 전혀 꿀라끄가 아닌 사람들이 체포되고 추방되었다는 것이다. 즉 부농이든 빈농이든, 단지 집단화 반대자들에 불과한 이른바 ‘이념적’ 꿀라끄의 추방도 함께 이루어졌다.
강압과 일시적 후퇴
이루 말할 수 없는 혼란 속에서 시작된 대공세에 대해 1930년 1~2월동안 중앙의 신문들은 집단화강제에 주의를 주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바로 그해 봄까지 집단화를 완수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들을 시베리아의 당 공문서들로부터 인용하였다. 전면적 집단화에 대한 모든 조치들은 농민들의 심한 반발을 샀고 공문서에는 중앙아시아에서만 1930년 3월의 처음 닷새 동안 1만 7400명의 사람들이 참가한 45건의 공개시위들이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다른 자료에는 “일부 지역에서 꿀라끄와 반소비에트 분자들”이 도발한 “반란 및 소요들”이 있었다고 언급되어 있다.
혼란과 절망으로 인해 봄파종에 문제가 예상되자 스탈린은 집단화 중지를 명령하였다. 몇주안에 집단화된 농민의 비율은 55%(3월1일)에서 23%(6월 1일)로 떨어졌다. 그러나 그가 과도한 행위와 강압을 그만두라고 요구한 것은 사실이나 또한 당에 기존 집단화 수준을 ‘확고히할’것을 요구하여 혼란을 가중시켰다.
소련의 공식 설명은 선천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스탈린이 1929년 11월과 12월에 농민의 집단화 욕구를 과장하고, 관리들을 몰아세워 지나치게 성급하고 가혹하게 굴도록 했음을 인정했고, ‘레닌의 자발적 원리’에 따르지 않았음을 비난하였다. 그러나 이제 이는 집단화의 필수성과 자발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다시 비난 받고 있으며, 집단화의 폐해뿐만 아니라 정책 자체를 의문시하고 정책 전체를 잔인무도하게 강요된 대재난으로 특징짓고 있다.

공격이 재개되다
농촌의 집단 농장화로 인해 농가인들은 세금 납세의 의무, 공출의무를 지게 되었고 개개인의 농작물 및 육류 등은 농민소유가 아닌 국가소유의 것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러한 농촌의 농장 집단화는 도시에서 온 지도층의 무지와 강제로 인해 계속되는 위기를 맞는다. 그로인해 카자흐스탄의 경우, 1931~33년 총인구의 40%가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꿀라끄는 1930년 대체로 일소되어 꿀라끄적이고 부유한 농민들을 향해 공격하기 시작한다. 꿀라끄 청산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 있고 사적소유의 소멸화 정책이었다. 집단체에 가입해야만 공출의무를 조금이나마 덜 지고 처벌을 피할 수 있었다.

1932~33년의 위기
굶주린 농민들이 ‘사회주의’의 재산을 대규모로 약탈하기 시작했고 꼴호스 재산의 도둑질에 대한 처벌도 강화하였다. 불법적인 재산 몰수와 지나친 곡물조달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이 거세졌다.
한편, 도시인구의 급속한 성장으로 도시에서의 곡물수요는 증가했으나, 농촌은 하락하였다. 또한 축산물의 생산과 소비가 줄었는데 그는 고의적인 정책의 결과로써 농민과 그들의 가축에게 식량을 너무 적게 남겨놓았기 때문에 가축손실이 많아서였다. 1932년 곡물에 대한 혼란으로 스탈린은 조달압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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