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중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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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의 대중음악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머리말

2.대중음악이란?

3.대중음악이 시대에 미친 영향
3.1 개화기에서 광복전
3.2 1960~1970년대
3.3 1980년대
3.4 1990년대
3.5 2000년대 이후

4.대중음악의 문제점과 대안
4.1 음원유출 문제
4.2 뮤지션의 조로 문제
4.3 표절 문제
4.4 공연장 문제
4.5 매니지먼트사의 거대화
4.6 대중음악의 대안

5.대중음악 페스티벌의 발전방향
5.1 대중음악 페스티벌의 효과
5.2 해외 대중음악페스티벌의 현황 및 전망
5.3 해외 대중음악페스티벌의 성공요인
5.4 국내 주요 대중음악페스티벌의 현황과 전망

6.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3.2 1960~1970년대
현재 대중음악은 방송과 음반처럼 전파와 대량복사가 가능한 매체를 동반하는데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대중음악이 20세기 초부터 존재했다. 1928년대 당시엔 서양대중음악을 재즈라 통칭이 유행했다. 매일신보에서 ‘남자가수 베스트5’를 집계 발표한 때가 1935년이다. 해방 전후엔 작곡가 김해송 등이 활동했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지금도 불릴 정도로 생명이 긴 유행가들이 태어났다. 1950년대엔 맘보와 차차차, 탱고 붐이 일기도 했다. 그러다 60년대 중반에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이 무렵엔 해외에서 지미헨드릭스, 비틀즈, 밥 딜런처럼 훌륭한 뮤지션들이 대거 등장하여 한국의 젊은 이들에게도 영향을 주고 있었다. 1961년부터 1964년 사이에 민간방송사들이 잇따라 개국하고, 미 8군 무대에서 기량을 닦은 가수들도 가요계로 나오고 있었다. 물론 이전과 구별되는 보다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다. 당시엔 작곡가에게서 곡을 받거나 외곡의 히트송을 번안하여 부르는게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자기세계를 표현하는 음악을 스스로 만들어 노래하고, 이후에도 꾸준히 활동하며 오랜 자취를 남길 뮤지션들이 나타난 것이다. 싱어송라이터의 출현이다. ‘그룹사운드’의 선구자들인 키 보이스와 애드 포가 1964년부터 데뷔했는데, 이러한 록 밴드 1세대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 신중현이다. 밴드로, 그리고 작곡가로 왕성히 활동한 신중현은 훗날 그의 아들들인 신대철(시나위), 신윤철(서울전자음악단)과 함께 음악 가문을 이룬다. 또 한 사람은 양희은의 입술로 불려진 ‘아침이슬’ 의 김민기, 데뷔앨범은 전량 압수되었지만, 이후 ‘금관의 예수’,카세트테이프로 나온 ‘공장의 불빛’ , 그리고 ‘작은 연못’과 ‘상록수’, 특히 스토리 텔링 기법의 ‘백구’ 등과 함께 시대의 상징으로 남는다. 1968년 미국에서 돌아와 ‘모던 포크’와 ‘싱어송라이터’의 개념을 알린 젊은이가 있다. 그는 일반에 널리 퍼진 곡에서 멈추지 않고 최근까지 창작을 이어오며 ‘one day', 'as forever'처럼 아름답고, 호치민, 먼지처럼 자유분방한 작품들을 남기고 있다. 긴 세월에도 닳지 않는 음악적 호기심으로 열장의 앨범을 채운 뮤지션, 지금은 할아버지 로커가 된 젊은이, 그가 바로 한 대수다. 신중현이 대마초 파동에 휘말리고, 비판적 지성과 낭만적 감성의 김민기가 그늘 속에 숨은 것 것처럼 한 대수도 자유를 옭아맨 나라를 떠나야 했다. 그렇다고 그 때가 암흑기였던 것만은 아니다. 청년문화가 충만한 낭만시대 또한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냉전과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미국엔 히피가 있었고, 그들과 같은 록과 포크, 자유분방한 의식과 복장의 소유자들은 한국에도 있었다. 엄흑한 시대를 살아야 했던 젊은이들은 통기타와 청바지, 생맥주를 상징으로 낭만적인 청년문화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바다건너와 달리 ’반전과 평화‘등의 의식이 담긴 목소리는 덥수룩한 머리와 나팔바지 아래 감추어져야만 했다. 그 무렵엔 영미권의 팝 음악이 두루 전해지고 있었다. LP와 카세트테이프, 그리고 라디오로 음악을 즐기는 이들 사이에서 DJ가 더 인기인이었고, 다양한 음반을 보유한 음악다방들은 성황이었으며, 한창 때의 홍대클럽과 비슷한 나이트 클럽도 번창했다. 이는 두 가지 상황과 연결되는데 하나는 송창식, 윤형주, 양희은 등의 통기타 가수들이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고, 블루스에 바탕을 둔 이정선까지 포함하여 한국형 포크의 전성기가 도래한 것으로 낙관적인 태도와 삶에 대한 애정, 침울하지만 안온하기도 한 곡들이 만들어지고 널리 불러졌다. 다른 하나는 히식스를 비롯한 그룹사운드의 전성시대로 각종 경연대회와 록 페스티벌이 열리고, 인기밴드들은 나이트클럽에서 적잖은 수입도 올릴 수 있었다. 작곡, 작사, 연주, 노래를 서너 명이 멤버들이 모두 해결하는 밴드시스템은 한국에선 신선했다. 영미음악에 대한 열등감이 사라진 지금에야 부릴 수 있는 여유겠지만, 빈티는 좀 나더라도 그룹사운드의 소리는 나름의 매력의 있고, 서툴게 수용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독특한 ’시대의 소리’가 만들어졌다. 이처럼 속삭임과 외침이 공존하던 70년대 중반, 박정희 정권이 가요정화운동이란 구호를 들이밀며 물길을 틀어막는다. 군사독재정권의 하수인들은 음반검열로 대중음악의 허리를 끊고 질적으로도 퇴보시켰다. 음악인의 의식에 자기검열을 강요하고, 소재의 표현은 제한되었으며, 여기에 대마초파동까지 겹치자 거대한 감옥 같은 사회의 숨구멍은 닫혀버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새마을노래나 듣고 부를 순 없는 노릇이었다. 1977년에 열린 MBC 대학가요제는 공백을 채울 새로운 스타와 음악에 대한 요구였다. 기교에
참고문헌
선성원 지음,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대중가요, 현암사, 2008
임진모 지음, 우리대중음악의 큰 별들, 어진소리, 2004
사이먼 프리스,윌 스트로, 존 스트리트 엮음, 대중 음악의 이해, 한나래, 2005

인터넷 사이트
http://blog.naver.com/wonwoo_kim?Redirect=Log&logNo=100029660076
http://jisikworld.com/report/view.html?dno=345167&link=review
http://blog.naver.com/jinurock?Redirect=Log&logNo=120089456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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