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멸망과정 및 그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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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가야의 멸망과정 및 그 원인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가야의 멸망 과정
Ⅲ. 가야의 멸망 원인
1. 대내외적 원인
2. 자연환경 변화 원인
Ⅳ. 가야의 멸망 그 후
Ⅴ. 맺음말
참고 문헌
본문내용
Ⅱ. 가야의 멸망 과정


역사상에 나타났던 정치세력들은 그 시초를 알기는 어려우나, 멸망과정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한 결말을 전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가야의 경우에는 체계적인 역사기록을 남기지 못한 채 562년 신라에게 멸망함으로써, 그 세력의 성장 과정뿐만 아니라 멸망 과정 이르기까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면이 많다.
신라 ․ 〮백제 ․ 왜 세력을 이용하여 자구책을 도모하던 안라는 제 2차 사비회의가 결렬된 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백제 정벌을 요청하였다. 고구려도 백제를 견제할 필요성을 느껴 548년 정월에 예병 6천을 보내 백제의 독산성, 즉 마진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신라가 장군주진과 군사 3천을 보내오자 신라군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포로들의 증언을 통해 고구려와 안라 사이의 밀통이 발각됨으로써 안라는 무력화되었으며 백제의 부용세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전쟁 이후 가야는 백제군과 함께 삼국전쟁에 나서게 된다.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내분상황을 포착하고 공동으로 북진하여 한강유역을 탈취하려고 모색하고 있었다.
관산성 싸움은 신라와 백제가 한강 하류지역과 가야지역을 두고 패권을 다투는 일대결전이었다.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시아의 고대 교역로를 살펴볼 때, 가야지역은 일찍부터 해운 입지상 대왜 교역의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그리고 한강 하류일대도 남한지역의 세력들이 중국과 직접 교통할 수 있는 거점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특히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상실한 이후로 백제와 신라는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패권 다툼을 노골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쟁패가 한강유역 및 가야지역의 영유를 둘러싼 관산성 전투로 나타로 나타난 것이다. 전쟁초기에는 백제측이 유리하였으나, 신라의 전선을 깊숙이 쳐들어간 왕자 여창을 위문하려고 찾아가던 성왕이 복병에게 죽음을 당하자 백제·가야 연합군은 단번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백제는 그다지 큰 타격을 입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패배 이후에도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을 쉽사리 방어했으며 대가야가 멸망하기 불과 두 달 전에는 신라를 침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백제군이 《삼국사기》의 기록만큼 많은 타격을 입었다면 고구려의 침공을 막아낸다든가 신라를 침공하는 일이 곤란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백제가 관산성 전투에서 받은 타격은 군사적인 것이라기보다 왕의 전사로 인한 정치적 불안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여 원정하는 일은 상당기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에 비해 가야는 멸망 직전까지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었다.
백제가 수세에 몰려 있는 동안 신라는 한강 하류지역을 차지하고 가야연맹에 대한 패권까지 넘보게 되었다. 진흥왕은 555년 10월 북한산에 순행하여 순수비를 세워 강역을 확정하는 것을 시작으로, 557년 국원을 소경으로 삼았으며 558년 2월에는 왕경인들을 국원에 이주시키고 방어하였다. 한강유역 경영을 마친 후 신라는 가야 소국들을 병합하기 시작하였다. 제일 먼저 병합된 것은 안라국 사실상 안라는 이나사·마도 등을 중심으로 친신라적 교류를 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백제·왜의 교역 중개지로서 그들의 후원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왜·백제 양쪽으로부터 지원이 끊긴 상태에서는 쉽사리 신라에 투항하였을 것이다.
(560년경 병합)이었던 것 같다.
진흥왕은 재위 22년(561) 2월 상당수의 중앙관료들과 비자벌·한성·비리성·감문의 사방군주를 대동하고 창녕까지 순수해 와서 군사시위를 하였다. 이는 가야연맹을 위협함과 동시에 유화하려는 시위였다. 그러는 도중 562년 7월에 백제가 신라의 변경을 침략하였으며, 신라는 이를 격파하여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고 한다. 두 달 후에 대가야는 반란을 일으켰다는 명분 아래 신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대가야의 멸망과정에 대해 알아보자면,
가야국은 5세기말에서 6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지리적으로 인접한 백제 신라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을 받았다. 고구려에 눌려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남쪽으로 밀려온 백제와 신라는 중흥의 기틀을 다지면서 가야지역을 넘보았고 가야의 분국이었던 일본의 야마대가 없어지고 친백제의 야마도정권이 들어섬으로써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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