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제 교수의 기행문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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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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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박한제 교수의 기행문을 읽고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왕소군의 유적을 찾아서
2. 아! 통만성이여
3. 인생은 끝내 ‘空’과 ‘無’로 돌아가리니...
4.죽림은 사라지고 칠현의 이름만이 남아...
본문내용
1. 왕소군의 유적을 찾아서
박한제 교수는 박사학위 논문부터 지금까지 연구주제가 유목민족인 호족과 농경민족인 한족의 관계를 다루는 소위 ‘호한체제’ 라는 것이어서 왕소군 뿐만 아니라 역대 왕조 무덤 위주로 기행을 했는 듯하다.
처음에 왕소군을 찾아서를 읽었을 때 왕소군이 남자인줄 알았다. 또 박교수가 ‘그’라고 지칭하는 바람에 당연히 남자이고, 여러 왕중에 한명인줄로만 알았다.
왕소군은 한나라 조정 궁녀의 몸으로 삭풍이 불어대는 寒上 흉노 땅에서 생을 마친 비운의 여인이었다. 이런 왕소군묘가 있는 곳은 중국 내몽고자치주 수도 呼和浩特 서남 들판에 우뚝 서 있다. 그러나 가짜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한다. 박한제 교수는 자기의 논문에서 보듯이 중국의 역사 전개를 중원의 농경민족과 초원의 유목민족간, 즉 胡․漢의 투쟁의 역사라고 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왕소군은 몇천년에 걸친 호․한의 역사의 실체가 어떠했는가를 잘 반영하는 인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박한제 교수는 왕소군을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시절 읽은 李白의 시 ‘왕소군’을 통해서였다. 그때 남은 여인의 영상이 잊혀지지 않고 뇌리에 새겨져 있어 꼭 찾은 듯 하다.
중국사의 전개를 보면 흉노가 초원지역을 통일한 이후 중원 왕조는 끊임없이 유목민족의 침략에 시달려 왔는게 사실이다. 한나라 무제처럼 간혹 정벌을 행하기도 했지만, 돈과 물자를 주어 달래는 것이 전쟁비용보다 훨씬 싸게 먹혀 역대 정권은 소위 화친정책을 취하는 것이 통상적이었다. 수업시간에 배운 것처럼 흉노가 더 상위에 있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일종의 외교사절인 화번공주와 혼수품인 자장비를 흉노의 왕인 선우에게 바침으로써 번국과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다. 흉노의 입장에서는 중국 황실의 공주를 얻었다는 명분을 세울수 있었으므로 전쟁대신 화친정책을 수용한 것이다.
역사상 화번공주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북방 유목민족 지역으로 끌려간 여인들은 수없이 많지만, 한대의 오손공주 세군, 왕소군, 채문희 등과 당대의 문성공주 등이 특히 유명하다. 그러나 후세에 가장 화제가 된 여인은 채문희와 왕소군을 꼽을 수 있다고 한다.
박한제 교수는 채문희 얘기도 하는데, 중국 역대 비극적 여인의 전형처럼 흔히 거론되는 채문희의 본명은 채염으로 후한말 저명한 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