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사] 베르길리우스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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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로마사] 베르길리우스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0. 카이사르의 암살 (B.C.44 3. 15)

1. 카이사르의 암살 직후 - 장례식과 유언장 발표

2. 옥타비아누스의 등장

3. 2차 삼두정치의 성립

4.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대립

5.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6. 안토니우스의 몰락

7. 악티움 해전 - 옥타비아누스의 승리

8. 아우구스투스의 제정 창설




본문내용
2. 옥타비아누스의 등장
당시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군대집결지에 있었던 옥타비아누스는 한 달 뒤에 귀국한다. 키케로는 당시 막강하던 안토니우스를 견제하기 위해 옥타비아누스를 정치적으로 도우면서도 상속은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안토니우스 역시 레피두스와 결합하여 옥타비아누스의 상속을 방해한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 지지파들을 상당수 자신에게 끌어들여 카이사르 추모 경기대회를 주관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알린다. 이 때에 키케로는 안토니우스의 견제에 총력을 기울이면서 옥타비아누스를 비교적 다루기 쉬운 상대로 보았기 때문에 적극적인 이간정책을 쓴다. 44년 말부터 키케로는 필리피카이 연설을 통해 안토니우스를 탄핵한다. 이 연설에서 키케로는 안토니우스만을 비난하고 반면에 옥타비아누스에 대해서는 찬사를 보내는데, 이는 안토니우스의 견제와 동시에 두 사람 사이를 이간시키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43년에 옥타비아누스는 콘술들과 연합하여, 브루투스 파 중 한 명인 데키우스 브루투스를 공격하고 있던 안토니우스와 싸워 이긴다. 이 과정에서 두 명의 콘술들과 데키우스 브루투스는 사망한다. 무력으로 기선을 잡은 옥타비아누스는 19세의 나이에 콘술에 선출된다. 동시에 카이사르의 양자로서의 자격을 공인받는다. 이제 명백하게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정치적 후계자로 나선 것이다. 후계자로 나섬과 동시에 옥타비아누스는 암살자들을 유죄로 규정하고 추방하는 법을 성립시킨다. 옥타비아누스의 의외의 권력 장악력에 맞서 안토니우스는 레피두스와 연합 전선을 형성한다.

3. 2차 삼두정치의 성립
43년 11월, 북이탈리아의 볼로냐에서 2차 삼두정치가 성립된다. 안토니우스-레피두스-옥타비아누스의 3명에 의한 공동 통치체제가 성립된 것이다. 이들은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했고, 민회는 5년을 기한으로 삼두정치 체제를 위기관리 체제로 결정한다. 2차 삼두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