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 세계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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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양사] 세계혁명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억압과 착취를 비난한 셀리의 시(3000년 전 이집트 농민들의 노래는 말할 것도 없고)를 읽는 것은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가! 여전히 억압과 착취로 가득 찬 미래에 그것들이 읽혀질 때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ꡒ심지어 그 당시에도....ꡓ
-베르톨트 브레히트, 1938년에 셀리의 무정부상태의 가면극ꡓ을 읽고나서(Brencht, 1964)

들어가면서
혁명은 20세기 전쟁의 산물이었다. 나폴레옹 1세는 프로이센 왕이 군사적 재난과 영토 절반의 상실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았듯이 오스트리아 황제 역시 싸움에서 백번 지고도 운 좋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반면, 프랑스 혁명의 소산인 자기 자신은 단 한번의 패배로도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데에 몹시 불평했다. 그러나 20세기의 총력전이 그 전쟁에 말려든 국가들과 인민들에게 지운 부담은 너무도 무겁고 전례 없는 것이어서, 그들은 거의 자신의 한계점과 어쩌면 극한 점까지 기력을 소모해야만 했다.
러시아 혁명, 보다 정확히 말해서 1917년 10월의 볼세비키 혁명이,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이 19세기 역사에 대해 중심적인 사건이었듯이, 금세 기사에 중심적인 사건이 되었다.
이슬람교도들의 세계정복 첫 세기이래 10월 혁명의 세계적 확산에 필적할 만한 것은 없었다. 레닌이 페트로그라드의 핀란드 역에 도착한 지 불과 30~40년만에, 인류의 3분의 1이 ꡒ세계를 뒤흔든 10일ꡓ로부터 직접적으로 유래한 체제에서 레닌의 조직 모델인 공산당의 통치하에 살게 되었다.

▷Ⅰ
단기 20세기 대부분 동안, 소련 공산주의는 자신이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체제이자 자본주의를 이길 것으로 역사에 의해서 운명지어진 체제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시기의 상당 기간동안, 소련 공산주의의 이러한 우월성에 대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많은 사람들조차 공산주의가 승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전혀 확신하지 못했다.
단기 20세기가 경과함에 따라, 경쟁적인 두 사회체제 세력(1945년 이후 각 세력은 지구를 파괴할 무기를 휘두르는 초강대국 밑으로 동원되었다) 사이의 결투로서의 세계정치상은 점점 더 비현실적인 것이 되었다. 10월 혁명은 자코뱅 시절의 프랑스 혁명보다도 더욱 완전하고 더욱 비타협적으로 자신을 민족적이기보다는 세계적인 사건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 혁명은 러시아에 자유와 사회주의를 가져다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야기하기 위해서 일어난 것이었다.
차르체제는 1905년 혁명 이후, 이전 상태를 거의 회복하지 못했다. 1905년 혁명이 일어났을 때, 언제 나처럼 우유부단했고 무능했던 차르 체제는 급속히 치솟는 사회적 불만의 물결에 다시 한번 부딪쳤다. 전쟁 발발 직전 몇 달 동안에 러시아는 군대, 경찰, 공무원의 확고한 충성이 없었더라면 다시 한번 폭발 직전까지 갔을 것이다.
러시아 촌락 공동체의 집단적 관습에서 사회주의적 미래로 직행할 것이라고 보았던 낭만주의자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러시아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이 될 수도 없고 되지도 않을 것이라는 점을 당연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