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의 일화에서 엿보는 불교의 상대 신라 전파 및 수용

 1  `삼국유사`의 일화에서 엿보는 불교의 상대 신라 전파 및 수용-1
 2  `삼국유사`의 일화에서 엿보는 불교의 상대 신라 전파 및 수용-2
 3  `삼국유사`의 일화에서 엿보는 불교의 상대 신라 전파 및 수용-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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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삼국유사`의 일화에서 엿보는 불교의 상대 신라 전파 및 수용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목 차

1) 아도가 신라에서 터를 다졌다 (아도기라阿道基羅)

2) 원종이 법을 세우고 염촉이 자신을 희생했다 (원종흥법염촉멸신原宗興法猒髑滅身)

3) 가섭 부처가 앉는 자리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坐石)

4) 원광이 서쪽에서 배워 왔다 (원광서학圓光西學)

5) 자장은 법과 계율을 말했다 (자장정률慈藏定律)

6) 원효는 얽매이지 않았다 (원효불기元曉不羈)


본문내용

이는 황룡사 일화와 마찬가지로 신라 불교가 민간 신앙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대등한 신앙 혹은 신라 불교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 융합했음을 보여준다.
화랑의 세속오계를 지은 사람도 원광이다.

또 열전(列傳)에 이런 기록이 있다. 어진 선비 귀산(貴山)이란 자는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마을의 추항(추項)과 친구가 되어 두 사람은 서로 말했다. "우리들이 사군자(士君子)들과 함께 사귀려면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여 처신하지 않는다면, 필경 욕 당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니 어찌 어진 사람을 찾아가서 도를 묻지 않겠는가." 이때 원광법사가 수나라에 갔다가 돌아와서 가슬갑(嘉瑟岬; 혹은 가서加西, 또는 가서嘉栖라고 하는데, 모두 방언方言이다. 갑岬은 속언俗言으로 고시古尸(곳)이라고 한다. 때문에 이것을 고시사古尸寺(곳절)라고 하니 갑사岬寺라는 것과 같다. 지금 운문사雲門寺 동쪽 9,000보步쯤 되는 곳에 가서현加西峴이 있는데, 혹은 가슬현嘉瑟峴이라고 하며, 고개의 북쪽 골짜기에 절터가 있으니 바로 이것이다)에 잠시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은 그에게 나아가 아뢰었다. "저희들 시속 선비는 어리석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한 말씀을 주시어 평생의 경계가 되게 해 주십시오." 원광이 말했다. "불교에는 보살계(菩薩戒)가 있으니, 1은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는 일이요, 2는 부모를 효도로 섬기는 일이요, 3은 벗을 신의(信義)로 사귀는 일이요, 4는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서지 않는 일이요, 5는 산 물건을 죽이는 데 가려서 한다는 일이다. 너희들은 이 일을 실행하여 소홀히 하지 말라." 귀산 등이 말했다. "다른 일은 모두 알아듣겠습니다마는, 말씀하신 바 '산 물건을 죽이는 데 가려서 한다'는 것은 아직 터득할 수가 없습니다." 원광이 말했다. "6재일(齋日)과 봄·여름에는 죽이지 않는 것이니 이것은 시기를 가리는 것이다. 말·소·개 등 가축을 죽이지 않고 고기가 한 점도 되지 못하는 세물(細物)을 죽이지 않는 것이니 이것은 물건을 가리는 것이다. 또한 죽일 수 있는 것도 또한 쓸 만큼만 하고 많이 죽이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속의 좋은 경계인 것이다." 귀산 등이 말했다. "지금부터 이 말을 받들어 실천하여 감히 어기지 않겠습니다." 그 후에 두 사람은 전쟁에 나가서 모두 국가에 큰 공을 세웠다.

여기서 나오는 원광의 가르침이 그대로 후세에 전해져서 화랑의 세속오계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오계의 네 번째와 다섯 번째는 불교에서 적어도 순수하게 전승하는 가르침이라고는 거의 보기 어렵다. 또한 다른 세 계율도 불교의 교리보다는 유교나 풍월도의 국가주의에 더 가깝게 닿아 있다. 따라서 불교의 승려인 원광이 선비에게 이런 계율을 주었다는 것은 신라의 불교가 실용 종교, 그리고 호국 불교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나타내는 일화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