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답사] 석굴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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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문화유적답사] 석굴암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석굴암의 창건
2. 왜 석굴의 형식으로 조성했는가?
3. 본존불
4. 본존불의 방향
5. 석굴암의 건축구조와 비례관계
6. 사천왕상
7. 천부상과 보살상
8. 11면 관음보살상
9. 10대 제자 (왼쪽)
10. 10대 제자 (오른쪽)
11. 팔부중 (북측)
12. 팔부중 (남측)
13. 석굴암이 가지는 의미
본문내용
1. 석굴암의 창건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 (751년)에 국왕의 뜻을 받들어 김대성이 주관하여 조영하였다. 경덕왕은 신라 중대 최후의 임금으로, 번영한 때를 맞아 예술에 있어서도 신라의 최전성기를 이룩하였다. 그는 석굴암과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불국사의 석교, 황용사종, 석가여래상등 많은 불사를 이르켰다. 김대성은 김씨 왕족 출신으로 재상의 자리인 중시에 있었다. 삼국유사 향전에 의하면, 석불사(석굴암)는 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는 현생의 부모를 위해 세워졌다 한다. 석굴암이 위치한 토함산은 신라의 5악의 하나로 김씨 왕가일족의 산골처였다.

2. 왜 석굴의 형식으로 조성했는가?
석굴암은 흙으로 된 토함산 동쪽 비탈면을 파내고, 인공으로 석재를 이용하여 굴의 형태로 만든 것이다. 석굴암은 왜 다른 사원들과 달리 석굴의 형식으로 만들어졌을까? 석굴암에 대한 궁금점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석굴암이 창건된 신라 경덕왕대는 정치, 문화의 각 방면에 걸쳐 유례없는 최고의 융성기를 이룩하였던 시기였다. 삼국을 통일한 지 이미 80여 년, 백제 및 고구려의 유민들을 무마하기 위한 작업도 정리되었고, 당나라와의 알력도 해소되었다. 즉, 통일 초의 수습기를 지나 안정과 내적인 충실을 얻은 시기였다.
또한, 당시의 불상과 사찰 조성기술 또한 극에 달한 때였다. 일례를 들어보면, 만불산이라는 가산(假山)을 만들어 그 안에 불상 1만구를 모시게 하여 당나라 황제에게 헌납하였더니, 당 태종이 이를 보고, "신라인의 기교는 하늘의 조화요, 사람의 기교(技巧)가 아니다"라고 감탄할 정도였다. 그러한 전성기의 신라인들은, 왜 사원을 조성하면서 굳이 토산(土山)인 토함산에 인공으로 돌을 쌓아 석굴을 만드는 방법을 택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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