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소설] 최서해의 `홍염`과 이석훈의 `이주민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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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현대소설] 최서해의 `홍염`과 이석훈의 `이주민열차`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두 작품 속의 시대와 디아스포라

Ⅱ. 최서해의 『홍염』
1. 작가 소개
2. 발표매체 소개
3. 작품 줄거리
4. 작품 해설

Ⅲ. 이석훈의 『이주민열차』
1. 작가 소개
2. 발표매체 소개
3. 작품 줄거리
4. 작품 해설

Ⅳ. 『홍염』과 『이주민열차』
1. 공통점
2. 차이점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두 작품 속의 시대와 디아스포라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용어는 그리스어에서 온 말로, 분산(分散) 또는 이산(離散)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중국으로 조선인들이 대거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이다. 그리고 20세기를 전후로 하여 조선민족의 만주 진출이 대폭 증가하였는데, 이러한 현상은 역사적으로 내려오던 맥락의 영향도 있겠지만 당시 조선 국내의 복잡한 환경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 조선민족의 만주이주의 원인으로는 정치적인 요인과 사회적인 요인도 있었지만, 경제적인 요인이 가장 크게 작용하였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실시된 일제의 식민지정책은 조선민족이 생존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최대한으로 박탈하였다. 그 중요한 수단의 하나가 토지조사사업이다. 이에 따라 경작지가 줄어들고 땅값이 올라 실업자가 늘어났다. 이에 더하여 조선에 흉년이 빈번하였다. 농민들의 경제력이 낮아짐에 따라 농업개량이 불가능하였으며 산림이 황폐되고 수원이 말라 한재가 따랐고 풍해, 기후불순 등은 재난을 한층 더 심하게 하였다. 이러한 복합적인 원인으로 인하여 조선민족은 국내에서 버티기가 더 이상 힘들어지게 되었고, 결국에는 만주로 떠나게 된다.

만주로 이주한 조선이주민 대부분은 살길을 찾아 떠나 온 무리였지만, 그들의 생활은 국내와 다를 바가 없었다. 1924년에 실시된 간도지방에 대한 조사에 따르면 조선이주민 중 농업인구는 조선이주민 인구의 90%를 차지하며, 조선이주민 농업인구 중 지주가 8%, 자작농이 36%, 소작중농이 24%, 빈농이 32%를 점하였다. 이는 같은 시기의 중국인 지주가 중국인 농업인구의 46%, 빈농이 8%였다는 점으로 보아 조선 농민의 처지는 최하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조선이주민 농업인구의 경제력은 국내에서와 다르지 않았다. 만주의 지주가 조선농민의 고혈을 빨아 먹는 주요한 수단은 지조였다. 가장 가혹한 것은 방청(榜靑)인데 지주가 소작인에게 식량, 종자, 역축 등을 대어주고 소작을 짓게 한 다음 가을에 지주의 요구대로 소작료를 바치는 것이다. 소작료는 최초의 병작으로부터 소작인이 4할을 차지하고 지주가 6할을 차지하는 4ㆍ6제로 하였다가 3ㆍ7제로 올랐으며 나중에는 2ㆍ8제까지 하였다. 고리대는 매달 이식이 60%이상 올라붙었다. 국내에서 일제의 경제적 압박에 시달리고 있던 조선민족은 만주농업이 흥한다는 소문을 듣고 만주로 이주를 하지만,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소문은 공연한 풍설(風說)이었을 뿐 만주에서의 생활도 국내에서와 마찬가지로 매우 가혹하였다.

Ⅱ. 최서해의 『홍염』

1. 작가 소개

▪ ‘작품 해석과 관련되는’ 최서해의 생애와, 그의 작품

최서해(1901~1932)는 함북 성진에서 가난한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나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13~14세부터 신구소설을 읽었다. 을 읽고 춘원과 교신하여 18세에 그의 소개로 《학지광》에 세 편의 수필을 발표했다. 18세 때 아버지를 찾아 간도로 이주하여 빼허에서 농노 생활을 하면서 인생과 조국의 의미를 깨닫고 부조리한 사회에 반항하려는 마음을 가졌다. 1923년 귀국하여 회령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다가 김동환 등과 사귀었다. 그는 1924년 단편소설 『토혈』,『고국』으로 등단하여 1931년 장편소설 『호외시대』를 끝으로 작가 생활을 마칠 때까지, 치열한 작가 정신으로 일관하였다. 그는 한국 근대문학 초창기 대부분의 작가들처럼 시ㆍ소설ㆍ수필ㆍ평론 등에 걸쳐 장르의 영역을 개척해 나갔다. 그 결과 소설 60편, 수필 47편, 평론 19편, 그 외 몇 편의 시와 잡문을 남겼다.

참고문헌

1. 단행본
김종회, 『디아스포라를 넘어서』, 민음사, 2007.
오정희, 『중국인 거리 외』, 하서출판사, 2006.
이문열, 『한국 문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1995.
주성화, 『중국 조선인 이주사』, 한국학술정보, 2007.

2. 논문
곽윤경, 「최서해 단편소설 연구」, 목포대학교 석사논문, 2011.
김병구, 「최서해 소설의 (탈)식민성 연구―식민지적 정신성의 문제를 중심으로」, 『최서해문학의 재조명』, 국학자료원, 2002.
김지영, 「최서해 소설의 문학사적 의의」, 국민대학교 석사논문, 2005.

3. 인터넷 자료
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http://encykorea.aks.ac.kr.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한국학중앙연구원http://people.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