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빛과 얼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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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민족의 빛과 얼 정약용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호남실학의 핵
-민족의 빛과 얼 정약용 -
1. 그는 누구인가
정약용, 그는 조선이 낳은 위대한 학자이다. 임진 , 병자의 두 큰 난리를 겪은 후 조선의 모든 제도는 무너지고 백성의 삶은 궁핍해져서, 기존의 체제나 사상으로는 더 이상 중세 후기 사회를 지탱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조선 후기 사회에서 기존의 학문과 사상으로는 시대의 질곡을 풀어나갈 방법이 없다고 여기며 새로운 학문과 사상의 탐색에 마음을 기울인 일군의 학자들을 우리는 실학자라고 부르고 있다. 다산 정약용이야 말로 반계와 성호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더 높은 단계의 사상과 학문으로 대성하였으며, 연암 박지원, 담헌 홍대용, 초정 박제가 등의 북학파, 즉 이용후생의 논리를 극대화 하던 실학자들의 학설까지 모두 수용하여 실학전체의 학문을 집대성한 학자의 지위를 차지한 인물이다.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박석무 p 15쪽 인용
1762(영조 38) -1836(헌종2). 다산은 1762년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당시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7세 때 지은 산이라는 시가 지금까지 이를 입증해 준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다. (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1777년 다산은 자신의 학문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스승을 만나게 되었으니 그가 실학의 선구자 성호 이익이다. 다산이 두 살 되던 해에 성호가 세상을 떠나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다산은 성호의 길을 접하고 학문을 굳히게 되었다. 다산은 22세 때(1783)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때 당시의 임금인 정조의 눈에 뛰어 인정받게 되는데 그것은 그의 뛰어난 재능과 학문 때문이었다. 다산은 성균관 생활이 끝날 때까지 여러 차례 시험을 통해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28세때 1789년 문과에 급제하여 본격적인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그는 첫 벼슬인 희릉직장을 비롯하여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을 거쳤다. 이즈음 그는 성설과 기중도설을 지어 수원성을 쌓는데 유형거와 거중기를 만들어서 사용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이로써 많은 경비를 절약할 수 있었다.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서는 가난하고 핍박받는 백성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암행어사로서 그는 전 연천 현감 김향직과 전 상양 군수 강명길의 폭정을 고발하여 처벌하도록 하였으며 이를 통해 책임과 관리의 의무를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천주교와 만남도 그의 삶에 큰 비난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23세때 천주교를 처음으로 접했다. 이후 그는 한때 천주교 서적을 읽고 심취하기도 하였으나 성균관에서 학업에 정진하느라고 곧 손을 떼었다. 그는 천주교 신앙과 서양과학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기도 하였으니 또한 갖은 시련과 좌절을 맞보기도 하였다.
2. 강진 유배지에서(1801-1818)
정조가 서거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다산의 생애 최대의 전환기를 맞는다. 소론과 남인 사이의 당쟁이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비화하면서 다산은 천주교인으로 지목받아 유배형을 받게 된다. 이때 다산은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
강진에서의 유배기간은 다산에게는 고통의 세월이었지만 학문적으로는 매우 알찬 결실을 얻은 수확기였다. 5백여권에 달하는 그의 저서 대부분이 유배지에서 이루어졌으니 18년 동안에 걸친 강진 유배기는 저술 작업 기간이었다고 할 만하다. 특히 이 시기의 경세학과 더불어 다산사상의 도축을 이루는 경학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는 유배지에서도 제자들을 모아 교육하였으며, 이들 제자들은 또한 다산 저술 작업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다산학술문화재단 홈페이지 (생애~사상) 인용
3. 학문과 사상
그의 사상은 형이상학, 윤리, 종교,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등 매우 복합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대체적으로 유기적인 관련을 가지고 정합성을 띄고 결과적으로 전근대적인 이학의 사상을 벗어나는 이른바 탈이학적 성격을 공유하는데서 서로 일치한다. 한국의 성리학과 실학 윤사순 252쪽 인용
그리고 조선후기의 세상은 썩고 병들지 않은 분야가 없었다는 것이 다산의 진단이었다. 그는 털끝하나 병들지 않은 분야가 없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만다. 라고 말하며 개혁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최초의 경세대작은 바로 경세유표인데 그의 저작 목적도 뚜렷하다. ‘신아지구방新我之舊邦’ 이라고 하여 오래된 조선이라는 나라를 통째로 개혁해 보겠다는 뜻인 것이다. 즉 나라를 완전히 개혁하여 새로운 체제로 바꾸려는 의사로 경세유표를 저작한 것이다. 목민심서의 저작 목적도 뚜렷하다. 현행법 테두리 안에서라도 우리 백성들을 살려내 보자. 즉 법과 제도를 고치고 바꾸지 못한다면, 공직자들이 마음과 몸을 제대로 수양하여 청렴한 생활을 함으로써 세상이 바르게 되고 백성들이 숨을 돌리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 행정에서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펴서 아사지경의 인민들을 살려 내자는 의도였다.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박석무 18쪽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