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해방전후시기의 각 인물들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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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문과학 해방전후시기의 각 인물들의 삶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해방전후시기의 각 인물들의 삶]
1. 김성수의 삶
교육운동
식민지 조국의 독립은 진정한 교육에서 출발한다는 것이 내 일관된 신념이었다. 1914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사립학교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나는 최남선, 안재홍 등 일본 유학시절 만났던 친구들과 함께 관련 자료를 모아 1915년 봄 백산학교라는 이름의 사립학교 설립 안을 만들었다. 그러나 내 첫 시도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좌절당해야 했다.
그러던 차에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던 중앙학교로부터 운영을 맡아달라는 의뢰가 들어왔고 나는 젊은이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우겠다는 신념에 따라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는 중앙학교 인수를 지나친 모험이라고 생각하는 부모님을 설득하고 인수 비용을 얻어내 1915년4월 중앙학교를 인수했다. 내가 동경 유학시절부터 키워왔던 민족교육의 꿈이 처음으로 실현된 것이다.
중앙학교를 인수한 나는 근대적인 경영방식을 도입, 학교 운영을 근대적 합리적으로 바꿔나갔다. 나는 그곳에서 직접 영어와 경제를 가르쳤으며 1917년엔 중앙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해 12월엔 서울 종로구 화동에서 종로구 계동의 근대식 건물로 학교를 옮겼다.
나와 내 주변의 도움과 노력에 힘입어 중앙학교는 사학의 명문으로 성장해나갔다. 특히 한국어 교습이나 민족주의 교육을 통해 민족 교육의 요람으로 자리 잡았다. 그것은 3·1운동에서 수행했던 중앙학교의 역할을 보면 잘 드러난다. 당시 중앙학교 교장이었던 송진우 선생 등이 3·1운동의 준비 과정에서 지대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1918년 겨울부터 중앙학교의 숙직실은 3·1운동의 준비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나와 송진우 선생 그리고 그 외 학교 관계자들은 학교를 이처럼 막후에서 3·1운동에 지원을 하며 3.1 운동을 도왔다. 뿐만 아니라 1926년 순종의 국장일에 있었던 6·10 만세운동도 중앙학교 학생들의 주도로 이뤄졌다.
나는 중등교육 못지않게 고등교육의 중요성도 절감했다. 식민지라는 여건 때문에 유능한 젊은이들이 고등교육을 포기하거나 외국으로 나가야 하는 현실을 지켜본 나는 그것이야말로 민족의 재원 손실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1932년6월 재정난을 겪고 있던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했다. 나는 유럽과 미국 유수의 대학을 둘러보고 그들의 선진적인 제도와 시스템을 보성전문학교에 도입하는 등 광복 때까지 보성전문학교에 깊은 애정과 관심을 쏟았다.
내가 보성전문학교를 인수 후 끊임없는 지원과 노력으로 학교는 발전을 거듭했고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했다. 그러나 1938년 이후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하면서 보성전문학교도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보성전문의 민족교육에도 탄압이 가해지면서 그 교육이 직업교육의 수준으로 제한받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