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사] - 정철의 생애, 관동별곡 분석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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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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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정철의 생애와 관동별곡 분석을 중심으로

1. 서론
2. 정철의 생애
3. 관동별곡
(1). 관동별곡이란
(2). 창작배경
(3). 작품 분석
4. 관동별곡의 의의와 특징
5. 결론
1. 서론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작품의 제목을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있어 고등학생들은 정철의 작품을 심층적으로 배우게 된다. 본인도 고등학교에서 문학을 배우면서 정철의 작품을 배우게 되었다. 관동별곡과 사미인곡, 그리고 속미인곡 모두 배웠는데 본인의 친구들은 그저 어렵다고만 생각해서 시험공부를 하는 내내 정철을 많이 원망하기도 했으나 본인은 작품의 한 줄, 한 줄에 나타나있는 정철의 속마음을 깊이 파헤칠 수 있어서 뜻 깊은 시간이었다. 정철은 그만큼 가사 문학에 있어서 중요한 문학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정철의 문학을 분석함으로써 조선 전기 시대의 가사문학의 형태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뛰어난 표현력과 언어 구사의 공교함, 우리말의 효과적 사용 등이 나타나있다. 긴 분량에도 불구하고 문장 하나하나에는 정철이 말하고자하는 바가 명확히 드러나 있어 작품을 구성하는 한 문장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번 보고서에서는 정철의 생애를 살펴보며 정철이 이러한 문학작품을 남기게 된 전후 상황을 살펴보고 그의 작품 중 하나인 관동별곡을 심층적으로 분석해보고자 한다.
2. 정철의 생애
송강 정철은 1536년 12월 6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송강의 세 누님 중 맏누님이 인종의 귀인으로 입궐하게 되면서 송강의 가문은 비로소 벼슬의 길이 열리고 가계 형편도 많이 나아졌으며, 이로 인해 송강은 왕실에 자연스럽게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둘째 누님과 막내 누님 또한 사대부가에 출가하면서 화려한 유년시절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송강의 삶에 비극이 찾아왔다. 1545년 을사사화가 발발하며 송강의 형님과 누나들이 대부분 피해를 입었고, 1547년 부친은 귀양을 가고 맏형은 유배 도중 죽었다. 둘째 형은 암울한 정치적 현실에 실의하며 지방에 은거하였다. 어린 송강은 아버지의 유배지를 따라 다니며 아버지와 고난을 함께 겪었다.
1551년 명종은 원자 탄생 특사로 송강의 부친을 유배지에서 풀어주었으며 이에 따라 송강과 아버지는 창평으로 내려가 정착한다. 송강은 이곳에서 11년동안 문학적, 학문적, 인격적 소양을 갖추며 성장한다. 그는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등 호남의 대 스승들로부터 학문을 배우고 문학적 재능을 키워나갔으며 사촌들에게 재산을 물려받으며 경제적인 안정을 얻었다. 송강의 문학이 가사문학의 최고봉으로 뽑힐 만큼 그의 작품 실력이 뛰어난 이유는 그의 천부적인 재능이 밑거름이 되기도 했지만, 당대 최고의 문인들에게 특별한 교육을 받은 영향도 있다.
송강에게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하서 김인후이다. 김인후는 송강의 학문뿐만 아니라 성격 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김인후는 인종이 승하하자 크게 애통해하며 매년 인종의 기일이 되면 산으로 들어가 술을 마시며 곡을 하였는데 한창 예민한 나이의 송강이 이러한 하서의 태도를 지켜보면서 그의 성격 및 인생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의 시의 비장하고 처절한 충군의 정한은 이때 하서로부터 말미암은 것으로 보인다.
송강은 율곡 이이와도 긴밀한 관계를 다졌다. 당시의 정치적 경륜이 뛰어나 조야의 증망을 한 몸에 받은 율곡은 송강과 정치적 이념을 함께 했다.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그들은 불화하기도 하였으나 율곡은 송강이 정치적 곤경에 처할 때마다 그를 변호해 주었다.
송강은 이러한 스승들의 가르침에 힘입어 1562년, 27세에 문과에 장원 급제를 하게 된다. 어렸을 때 누나를 따라 궁에 들어가면서 당시 대군이던 명종과 교류를 하면서 쌓은 정의도 있어 그의 관직 생활은 순조로운 듯 하였다.
그러나 명종의 종형인 경양군이 처갓집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처남을 유인하여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자, 송강이 이 사건의 법 집행을 맡게 되었다. 명종은 자신의 형을 살려달라며 송강에게 부탁했지만 그는 경양군 부자를 처형했다. 이로 인해 송강은 오랫동안 한직에 머물러야 했다. 그 뒤 좌랑, 현감, 성균관 직강, 홍문관 부수찬 등을 역시하면서 송강은 32세에 홍문관 수찬에 제수됨으로써 정치 생활에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1570년, 35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2년간 시묘 살이를 하고 1573년에는 모친상을 입어 또 다시 2년간 시묘 살이를 하게 된다.
동서의 분당이 구체화되는 가운데 그는 강직한 성품으로 쟁론의 서두에 서게 된다. 송강은 조정을 율곡에게 부탁하고 창평으로 내려가 40세에서 42세까지 창평에 거주하며 자연과 교류하는 세월을 보낸다. 그동안 그는 관직을 제수 받았으나 거절했다. 송강이 다시 관직에 나선 것은 인성왕후가 세상을 뜨자 상에 임하고 난 후이다. 이때는 동인과 서인의 대립적 기세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1580년 선조는 송강을 강원도 관찰사를 제수한다. 송강은 관동의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하며 을 생산한 것이다. 그 뒤 송강은 평생의 지기인 율곡을 잃고 50세에 조정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는 창평으로 내려가 머물며 , , 등 유명한 작품을 남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