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로드 모네 정원 의자에 앉아 있는 까밀 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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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끌로드 모네 정원 의자에 앉아 있는 까밀 모네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Claude Monet : Camille Monet on a Garden Bench (The Bench), 1873
끌로드 모네 : 「정원 의자에 앉아 있는 까밀 모네」, 1873년작.
Unease in the shade of the trees : 나무 그림자아래 드리워진 불안.
그림에 묘사된 정원 안에는 두 명의 여인과 한명의 남성, 이렇게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벤치 위에 앉아 있는 여인은 분명하게 누군지 알아볼 수 있다 - 그녀는 화가의 아내이자 그가 가장 좋아하는 모델인 까밀 Camille 이다. 살짝 앞쪽을 향하여 몸을 기대고, 관찰자 쪽으로 몸을 튼 채 우리를 크고 검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옆에는 아마도 벤치의 등 쪽에 몸을 기대고 있는 한 신사가 가져온 것 임직한 한 다발의 꽃이 놓여 있다.
Claude Monet, , 1875.
가로 방향의 붓질 자국은 까밀이 흰 장갑을 낀 손에 편지를 들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미술사학자들은 그 편지의 내용이 아마도 누군가의 부고(訃告)이거나 애도의 내용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나쁜 소식들이 아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께서 어제 돌아가셨다.” 라고 모네는 1873년 9월 23일에 기록하고 있다. 그 날은 아마도 이 제작날짜가 기록되지 않은 그림이 그려진 날일 것이다. 끌로드 모네(1840-1926)에게 있어서 이 기간은 작품 활동이 왕성했던 기간 이었다; 그는 세느강의 기슭, 초원, 들판, 그리고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 정원을 그린 풍경화를 계속해서 그려냈다. 모네가 1871년도 말에 그의 젊은 아내와 4살배기 아들 Jean과 함께 프랑스의 Argenteuil 지방 근처 시골에 위치해 있는 집으로 이사했는데, 이 정원은 그 집에 딸려있는 것이었다.
그 지역은 파리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 있었던 곳으로, 그들은 세느강을 따라 배를 타고 이동해왔다. 이것은 미술 애호가들에게는 모네나 르누아르, 마네, 카유보트 등의 그림을 통해 매우 친숙해진 곳이다. 빛, 공기의 색깔, 물에 비친 그림자들. 그들 모두는 도시에 있는 그들의 화실을 떠나 강가에서 햇빛을 받으며 그림을 그리는 것(plein air- 외광파(外光派), 옥외주의(屋外主義)를 뜻함 : 역자주)을 통해 이러한 장면들을 포착해 내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이었다. 곧 Argenteuil 근방은 낭만주의파에게 있어서 황금기였던 시절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카유보트도 마찬가지지만 모네는 한 정원을 계속해서 그려댔다. 언뜻 보면 이 그림들은 목가적인 풍경을 그린 그림으로서 우아한 도시인들이 전원생활을 즐기고 있는 장면에 대한 묘사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The Bench와 같은 그림에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편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바로 등장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점인데, 그것은 모네가 이들 사이에 어떤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긴 했지만 그게 뭔지는 모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침내 벗어난 가난 Out of poverty at last
뒤뜰에서는 양산을 쓴 한 여인이 풍성하게 자라난 제라늄 화단을 열심히 살펴보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등장인물도 충분히 볼 수 있는 자세로 서 있다. 그녀의 양산 위쪽으로는 모네가 1871년 후반부터 빌려 생활하기 시작했던 집의 한 귀퉁이가 보인다. 그 집과 정원은 Argenteuil에서도 살기 좋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모네는 일 년에 1000프랑이나 집을 빌리는 대가로 지불했다. 비교를 위해서 잠시 예를 들어보자면, 공장 노동자는 같은 시기에 2500프랑을 지불하면 집을 살 수 있었다. 따라서 모네는 당시 경제적으로 꽤 넉넉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겨우 최근에 와서야 그렇게 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는 프랑스의 Le Havre 지방에서 원래는 중산층이었지만 가난해져버린 식료품집의 아들로 태어났다. 1859년도에 그는 파리로 이사를 왔다. 그는 부유한 아주머니 Lecat 부인으로부터 경제적으로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 부인은 모네를 경제적으로 지원해주는 대가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열심히 일할 것, 꼭 화가로서 성공을 거둘 것을 요구했다. 만약 그가 부인을 실망하게 하면, 부인은 그의 용돈을 끊어버렸다. 그 젊은 화가는 틀에 박힌 듯이 고루한 미술학교를 매우 거북스럽게 느꼈다. 결국 그는 개방적인 분위기에서 새로운 모티프와 기술에 대한 실험을 하기 위해 그 학교를 떠났다. 그의 작품 중 소수만이 공식적인 살롱(내지는 화랑)에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수년간, 그는 낭만적으로 묘사하자면 보헤미안식이라고 할 수 있을 삶을 살았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극도로 가난한 삶에 불과했다.
부유한 친구들에게 구걸하듯이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의 편지는 그의 상태가 어떠했는지 보여준다. 모네는 빚을 지고 있었고, 그는 그에게 오는 독촉장들을 두려워했다. 화가인 바질Frederic Bazille 과 카유보트가 이 굶고 있는 가난한 화가를 도와주었다. 그전에 그 자신도 전혀 부유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르누아르도 그의 부모님 집을 떠나 모네를 만나러 갈때 그의 주머니에 빵을 가득 채워가지고 갔다. 그 당시 그의 모델이었던 까밀과 함께 살고 있었던 모네의 삶은 “가엾음” 그 차제였다고 르누아르가 1869년에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은 심지어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날도 많았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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