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셉 콘라드의 어둠의 속 어둠의 심연 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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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셉 콘라드의 어둠의 속 어둠의 심연 에 대하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1. 서론
조셉 콘라드(Joseph Conrad, 1857-1924)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접근 방법은 인간 조건 및 인간성에 대한 고찰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대표작인 『암흑의 핵심Heart of Darkness』(1899)는 태초로의 여행, 초월적 지식을 향한 정신적 여정을 다룬 작품, 또는 인간의 잠재된 어두운 본능에 대한 분석으로 읽혀졌다. 그리고 1980년경부터 시작된 해체주의, 페미니즘, 신역사주의, 탈식민주의 등 비평이론의 유행과 더불어 이러한 이론의 분석대상으로 가장 인기 있는 작품 중의 하나가 되었다.
1975년, 나이지리아 출신의 소설가 치누아 아체베(Chinua Achebe, 1930- )가 『암흑의 핵심』같은 철저한 인종차별주의자의 작품은 대학의 강의 목록에서 빼버려야 한다고 주장한 이후, 탈식민주의 이론과 맞물려 제국주의와 반제국주의의 논쟁은 콘라드 연구에 있어 주요한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다. 콘라드의 작품을 인간의 내면 세계에 대한 깊은 고찰로 읽던 독자들은, 아체베 이후 콘라드의 작품에서 아프리카와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백인의 내면적 성장을 위한 배경이나 도구에 불과한 것으로 묘사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아체베에게 동조하며 콘라드가 당대 지배 이데올로기에 갇힌 제국주의자라는 주장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프레드릭 제임슨은 콘라드 작품이 모더니즘의 회의적 성찰을 통해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동시에 대중 문학인 로만스 장르에 나타나는 당대의 인종적 이데올로기의 정형을 그대로 답습하는 분열 증세를 보인다고 주장하였으며, 패트릭 브랜틀링어는 『암흑의 핵심』을 예로 들어 콘라드의 작품이 사실적인 고발문학인 동시에 제국주의 로맨스 장르의 이분법적 시각을 차용하는 모순을 보이는 작품이라고 분석하기도 하였다. 베니타 페리는 콘라드가 아예 우주를 두 적대적 세력의 갈등과 대립으로 보고 의식적으로 그 이중성을 형상화한 작가라고 주장하였다. 이들 비평가들은 콘라드의 반(反)제국주의적 메시지를 부인하지는 않으나, 그의 형이상학적 언어와 인상주의 기법과 같은 미학적 장치로 인해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의 주제가 흐려지거나 훼손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국내에서도 콘라드의 인간조건에 대한 실존적 고찰과 그의 서술기법에 대한 분석이 제국주의와 반제국주의 공방으로 이어져, 독자의 시각에 따라 콘라드가 제국주의의 옹호자라는 주장에서 제국주의에 대해 회의적인 작가라는 대립된 평가가 동시에 이루어져 왔다.
2. 본론
1) 작품의 근간이 되는 작가의 성장 배경
조셉 콘라드는 1857년 12월 3일 포돌리아 지방(현재 우크라이나)의 베르드조프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의 이름은 유제프 테오도르 콘라드 코줴니오프스키(Jozef Teodor Konrad Korzeniowski)로 주로 Konrad로 불렸는데, 이 이름은 폴란드의 애국 시인 미츠키에비츠(Adam Mickiewicz)의 서사시 『콘라드 발렌로드』(Konrad Wallenrod)의 주인공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콘라드의 아버지 아폴로(Apollo Korzeniowski)는 폴란드의 귀족 계급으로서 급진적인 독립 운동가였으며, 시와 희곡을 쓴 문학가이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폴란드인들을 교화시키려는 애국적인 목적으로 많은 외국 작품을 번역하였고, 이 작품들은 독서가 유일한 즐거움이었던 콘라드에게 귀중한 문학적 보고가 되었다. 콘라드가 고아가 된 11살 이후에 주된 후견인이 되어준 사람은 그의 외삼촌 타테우쉬 보브로프스키(Tedeusz Bobrowski)였다. 타테우쉬는 콘라드에게 지극한 사랑을 쏟았으며 콘라드가 작가가 되는 데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1872년, 콘라드는 선원이 되려는 계획을 세우고, 처음에는 가족의 반대에 부딪쳤으나 1974년에 마르세유로 떠나 프랑스 상선의 선원이 되었다.
콘라드는 그의 『자전적 기록A Personal Record』이라는 책에서 어린 시절에 자기가 아프리카 대륙에 대해 각별한 꿈을 꾼 적이 있음을 회고하고 있다. 즉 그는 아프리카의 지도를 볼 때마다 그 당시 아직도 공백 상태로 남아 있던 중앙 부분에 손가락을 대고 “내가 자라면 이곳에 가봐야지”라고 말하곤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1890년에 아프리카의 콩고 강에서 기선의 선장이 된 것은 그의 어린 시절의 꿈이 실현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때의 경험이 바로 『암흑의 핵심』에서 자세히 드러난다. 서두에서 콘라드는 콩고 강에 매료되어 친척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콩고 강의 증기선의 선장직을 맡는 말로우를 그리는데, 그에게는 실제로 브뤼셀에 마그리트 포라도프스카라는 친척이 있었다. 이 아주머니는 과학계에서 상당한 명성을 누리던 에밀 가셰의 딸로, 그녀 자신도 소설가로서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콘라드에게는 무엇보다도 이 아주머니가 브뤼셀에 있는 식민 사업가들과 친분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1875년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는 ‘국제 중앙아프리카 문명 협회(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the Civilization of Central Africa)’를 설립하여 자신이 회장이 되었다. 이름은 ‘문명 협회’였으나 사실은 콩고에서 수익을 올려 왕가의 재산을 축적하려는 것이었다. 이 때부터 유럽에서는 중앙 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1889년 당시는 콩고 강이 화제의 초점이 되었다. 1876년과 1877년, 스탠리는 콩고 강 하류까지 탐험하였고, 1889년 2월 17일 탐험을 재개하여, 과학계언론계정치계상업계 등 전 유럽이 그의 탐험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레오폴드 2세는 이 탐험도 교묘히 이용하여 국제주의와 박애의 가면을 조금씩 벗어버리고 1885년에는 자신이 콩고 독립국왕임을 자처하면서 콩고 강 유역의 광대한 영토를 손에 넣었다. 이때 행해진 착취는 간혹 유럽 신문에 보도되기도 하였으나 그 실태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콩고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벨기에의 수도인 브뤼셀로 몰려들었다. 콘라드도 어릴 적에 느꼈던 콩고 강에 대한 매력에 다시 사로잡혀 콩고 강의 증기선 선장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콘라드가 신청한 중부 콩고 무역회사는 명목상으로는 개인 기업체였지만 실제로는 레오폴드의 심복 알베르 타이스가 조종하고 있었다. 이 회사는 1888년 말에 설립되었고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1889년 11월초 콘라드는 브뤼셀에 가서 타이스와 면접하였고, 그로부터 기선의 선장직을 약속받았다. 그렇지만 이 약속이 좀처럼 실현되지 않자 브뤼셀의 최고 경영자들과 친분이 있는 포라도프스카 아주머니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결심한다. 2개월 후 계약을 하고 5월 12일 콩고 강을 향해 출발하였다. 이렇듯 소설 속 대개의 일정이나 사건이 실제와 같으며, 중심 인물인 ‘커츠’는 실제로는 ‘조르쥬 앙뜨완느 끌랭’이라는 프랑스인으로, 이 두 인물이 어느 정도 일치하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여러 정황으로 판단하여 비슷한 점이 많았으리라고 대부분의 콘라드 학자들이 추정하고 있다.
떠나기 전에 가졌던 환상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콩고 강의 실상을 체험한 콘라드는 회사 대리인과의 불화와 건강 악화로 인해 그 해 말경 유럽을 향해 출발한다. 이때 악화된 건강은 쉽사리 회복되지 않아 콘라드는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었고, 평생 그 후유증을 앓았지만, 콩고의 경험은 괴로웠던 만큼 그에게 가치가 있었다. 후에 콘라드는 친구 에드워드 가넷에게 “콩고 강에 가기 이전의 나는 단지 동물에 불과했다”고 회상할 정도였다. 이것은 콩고 경험 덕분에 이제 콘라드가 풍부한 경험을 소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올바른 세계관도 정립하여 문학인으로서의 자질을 완비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때 얻은 병으로 콘라드는 선장으로서의 경력보다는 소설가로서의 경력에 점점 더 비중을 두지 않을 수 없게 된다.
2) 작품 설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