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사] - 매월당 김시습의 시와 문학사적 의의 연구

 1  [고전문학사] - 매월당 김시습의 시와 문학사적 의의 연구-1
 2  [고전문학사] - 매월당 김시습의 시와 문학사적 의의 연구-2
 3  [고전문학사] - 매월당 김시습의 시와 문학사적 의의 연구-3
 4  [고전문학사] - 매월당 김시습의 시와 문학사적 의의 연구-4
 5  [고전문학사] - 매월당 김시습의 시와 문학사적 의의 연구-5
 6  [고전문학사] - 매월당 김시습의 시와 문학사적 의의 연구-6
 7  [고전문학사] - 매월당 김시습의 시와 문학사적 의의 연구-7
 8  [고전문학사] - 매월당 김시습의 시와 문학사적 의의 연구-8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고전문학사] - 매월당 김시습의 시와 문학사적 의의 연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매월당 김시습의 시와 문학사적 의의 연구
Ⅰ.머리말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1435~1493)의 『금오신화』는 최남선의 연구를 기점으로 장덕순의 나말여초의 전기소설이 소설의 시원이라는 견해와 대립되기도 하지만 姜錫瑾, 「매월당 사유록의 南原 시문과 만복사저포기의 향토성 = Namwon poetry of Maewol-dang Sayou-rok and the local of 」, 2012, 3쪽
, 대체로 한국의 문학사상 최초의 소설로 여겨진다. 이에 따라 김시습은 고전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상을 가진 인물로 평가 받는다. 하지만, 김시습은 『금오신화』이외 에도 수만 여 편에 달하는 시와 글을 썼다. 현재에는 많이 남아있지 않은 실정이지만, 현존하는 김시습의 시는 그의 천재적인 문작 능력과 더불어 방외인으로 살 수 밖에 없었던 그의 삶과 내적인 고뇌를 잘 보여준다. 또한 그의 시에는 당대 백성들의 삶과 부패한 사회 현실이 잘 드러나고 이에 대해 비판하며 변화를 촉구한 진보적인 문인으로서 문학사적 의의가 깊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매월당 김시습의 문학을 연구 대상으로 선정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소설이 아닌 그의 시문학을 주제로 삼았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 연구는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진행된다. 먼저, 매월당 김시습의 생애을 조명해봄으로써 이로부터 그의 어떤 가치관과 생각이 형성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다음으로, 그의 가치관과 생각이 그의 시에 어떻게 드러나는지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시습의 시문학이 가지는 문학사적 의의를 밝히고자 한다.
Ⅱ. 김시습의 생애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1435~1493)은 태어난 지 여덟달 만에 글을 알아 외할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웠고 3세 때 시를 짓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의 재주 허주가 찾아와서 ‘나는 늙은이라’고 한데 대하여 ‘老木開花心不老’ 즉, ‘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마음은 젊었도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김주철외 「금오신화에 쓰노라」, 보리, p568
5세 때에는 이러한 그의 천재성이 세종에게까지 알려져 세종이 그의 재능을 시험한 뒤 놀라워하며 칭찬했다. 시습이라는 그의 이름도 집현전 학자 최치운(崔致雲)이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논어에 나오는 명칭으로 명명했다고 알려진다. 그는 열세 살이 될 때 까지 이계전, 김반, 윤상의 밑에서 사서삼경을 배우고 역사서와 제자서를 읽으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정화, 「生六臣 金時習 詩에 나타난 선비 精神 硏究 = A Study on the Scholar Mind of Saengyuksin Kim si-sups Poetry」, 2013, 3쪽
하지만, 그의 나이 15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18세까지 어머니의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삼년상을 치렀으며 그 와중에 조모상을 치르고 아버지마저 병이 들어 가정적으로 불행한 일을 겪었다. 그 후 21세에는 산 속에서 글공부에만 열중하던 중, 세조의 왕위찬탈 소식을 전해 듣고는 읽던 책을 모두 불사르고 머리를 깎고 방랑길에 올랐다고 한다. 방랑길에 오른 그는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약 2200여수의 시를 지었고 31세에는 금오산에 올라 37세까지 머물면서 우리나라의 최초의 소설이라고 여겨지는 금오신화를 저술하였다. 그리고 59세에 무량사에 머물다가 병들어 세상을 떠났다. 김주철외 「금오신화에 쓰노라」,보리, p563~567
매월당은 조선시대의 천재적인 문인인 동시에 생육신으로서 곧은 절개와 청렴함을 지닌 선비였으며, 방랑의 삶으로부터 얻은 고뇌를 백성의 삶과 결부시켜 노래했다. 또한 부패한 양반의 모습과 당대 사회 현실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비판하는 시와 글을 썼던 진보적인 지식인이었다. 이러한 그의 삶을 잘 보여주는 시로 그가 지은 溟州日錄중 ‘동봉가 여섯 곡(東峯六歌)’이 있다.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東峯六歌
有客有客號東峯 白髮多龍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