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 영유권 분쟁에 관한 고찰 - 백두산정계비의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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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간도 영유권 분쟁에 관한 고찰 - 백두산정계비의 건립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간도 영유권 분쟁에 관한 고찰
목차
Ⅰ. 머리말
Ⅱ. 간도 영유권 분쟁
1. 무인 중립지대의 형성
2. 백두산정계비의 건립
3. 국경회담
4. 대한제국 이후
Ⅲ. 맺음말
Ⅰ. 머리말
동북아시아는 지금 영토분쟁에 휩싸여 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계속되고 있고 중국과 일본은 센카쿠열도/댜오위다오를 놓고 대립하고 있다. 한 · 중간의 갈등으로는 간도(間島) 영유권 분쟁이 있다. 많은 국민들이 독도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으나 간도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생소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 또 간도문제는 아직 대한민국에서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간도 영유권 분쟁에 대하여 이 일의 배경과 원인을 알아보고 그 진행 과정과 현재 상황까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Ⅱ. 간도 영유권 분쟁
1. 무인 중립지대의 형성
조선의 영토는 세종대에 4군 6진을 개척함으로써 압록강(鴨綠江)-두만강(豆滿江)을 경계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경계개념은 지금처럼 명확한 선의 개념이라기엔 부족한 면이 있었다. 지금 간도라고 하는 지역에는 당시 여진족(女眞族)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중원에는 명(明)이 자리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여파로 명나라는 국력이 기울었고, 이 틈을 타 여진의 누르하치(努爾哈赤)가 부족을 규합해 청(淸)을 건국하였다. 새로이 건국된 청은 명을 멸망시키고 새로이 중원의 주인이 되었다.
명나라가 간도를 비롯한 만주지역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것에 비해 청나라는 이 지역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청나라는 이 지역을 자신들의 발상지로 신성시하기 시작했으며, 현종 6년(1668)에는 이 지역이 신성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봉금령(封禁令)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봉금령으로 인해 이 지역은 일정한 경계지대로 남아있게 되어 근대의 국경선이 성립되기 이전까지는 양국의 통치권이 벗어나 있는 지대이었으며 일종의 무주지(無主地)가 되었다. 엄찬호,「조·중간의 경계분쟁과 고지도」,『한일관계사연구』제42집, 한일관계사학회, 2012, p.314.
이러한 봉금정책은 대내적으로는 한족(漢族)의 유입을 금지하고 대외적으로는 조선인들의 범월(犯越) 남의 국경을 침범하거나 남의 나라에 몰래 들어감.
을 단속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었으며, 조선인과 청국인간의 범월로 인한 분쟁을 막기 위한 조치이기도 하였다.
조선에서도 범월문제로 인하여 지속적으로 청과 문제가 발생하자 숙종12년(1686) 비변사(備邊司)에서 절목(節目) 규칙의 조목, 조항. 또는 항목.
을 의정하여, 변방 백성들이 국경을 넘어서 삼을 캐는 것을 금지하였다. 엄찬호,「위 논문」, p.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