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중국 희곡의 기원과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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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문과학 중국 희곡의 기원과 발전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중국 희곡의 기원과 발전】
중국 희곡의 정의
중국에서 희곡(戱曲)이라는 명칭은 대본을 포함하여 특정한 조건을 갖춘 연극 전체를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희곡 (상연을 전제로 쓴 언어 텍스트- 드라마)의 의미와는 큰 차이가 있다. 중국희곡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우리가 지금 작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희곡은 남희(南戱)와 북잡극(北雜劇)이다. 남희는 남송때에 온주(溫州)를 중심으로 남부지방에서, 북잡극은 금말원초(金末元初) 북경(北京)을 중심으로 북방에서 형성되고 유행한 연극이다. 이 밖에도 전기(傳奇)는 남희가 명대(明代)에 새롭게 발전한 형태의 연극이며, 곤곡(崑曲)은 전기의 후신으로서 곤산(崑山) 지역의 음악인 곤강(崑腔)을 사용하는 연극이다. 곤곡은 지금도 무대에서 공연되고 있으며 경극(京劇)은 청대 중엽 북경에서 크게 유행하여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중국의 대표적 연극이다. 월극(越劇)은 옛날의 월나라 지역 즉 지금의 상해(上海)를 중심으로, 천극(川劇)은 사천(四川) 지역을 중심으로 유행했고 진강(秦腔)은 옛말 진(秦)나라 땅인 섬서성(陝西省) 일대에 퍼진 연극이다. 이처럼 각 지역에서 그 지역의 특성에 맞게 발전한 희곡을 통틀어 지방희(地方戱)라고 부르는데 그 종류만 하여도 약 360여 종이 넘는다.
Ⅱ. 기원
다양한 종류를 가진 중국희곡의 연원이 무엇이고 최초의 극형식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견해가 다양하다. 그러나 대체로 종교적 주술성이 강한 고대 원시가무와 춘추시대의 배우가 중국희곡의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점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중국희곡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왕국유(王國維) 역시 전국(戰國)시대 남방 초(楚)나라의 무격(巫覡)에서 중국희곡의 기원을 찾고 있다. 특히 초나라의 굴원(屈原)이 지은 구가(九歌)는 신령을 모시는 제무(祭巫)와 신령으로 분장한 신무(神巫)사이의 대화를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는데, 이야기만 보충하면 희곡이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서경 書經》〈순전 舜典〉에는 “내가 경(磬)을 치니 온갖 짐승이 춤추네.(子擊石石, 百獸率舞.)”라는 기록이 있다. 이 때 “짐승이 춤을 춘다”는 것은 실제 동물이 아닌 사람들이 짐승 모습으로 분장을 하고 춤을 추면서 신에게 제사지내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여씨춘추 呂氏春秋》〈고악 古樂〉에도 “갈천씨(葛天氏)의 음악은 세 사람이 쇠꼬리를 잡고서, 발을 구르며 8절을 노래하였다.(葛天氏之樂, 三人操牛尾, 投足以歌八闕.)”라는 기록이 있다.
배우는 창우(倡優) 또는 주유(侏儒)라고도 한다. 《국어 國語》〈정어 鄭語〉에 이미 기원전 774년 서주(西周) 유왕(幽王)의 궁전에 주유(侏儒)와 척시(戚施)라는 배우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사기 史記》〈골계열전 滑稽列傳〉에는 춘추(春秋)시대의 진(陳)나라 헌공(獻公)의 優施, 초나라 장왕(莊王)의 우맹(優孟) 등의 배우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의 주요 직무는 귀족과 국왕의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었지만, 때때로 다른 사람으로 분장하여 국왕의 잘못을 풍자하기도 하였다. 다른 인물로 분장하여 행동을 하는 배우들의 행동은 오늘날 연극의 배우와 큰 차이가 없다. 이후 중국희곡 성립의 기틀이 된 원시가무와 춘추시대의 배우는 각각 가무희(歌舞戱)와 골계희(滑稽戱)라는 민간예술로 계승되었다.
1. 가무희(歌舞戱): 종교적인 성격의 원시가무를 계승한 가무희는 종교적 의식인 나례(儺禮)와 종교적 의미를 탈피한 순수오락을 위한 가무희로 각기 발전한다. 나례는 바로 매년 섣달 그믐날에 거행되었던 종교적인 의식으로서, 곰가죽을 걸치고 눈이 네 개인 가면을 쓴 방상씨(方相氏)가 가면을 쓰고 짐승분장을 한 열 두 짐승와 한 무리의 아이들을 이끌고서 역귀를 몰아내는 것이다. 이러한 나례는 청대까지 이어지면서 중국희곡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목제가면을 쓰고 연기를 하는 나희(儺戱)로 발전하였다.
순수오락을 위한 가무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오균(吳均460-520)의 《서경잡기 西京雜記》에 실린〈동해황공 東海黃公>에 실려 있다.
- 동해 사람 황공은 젊어서 법술을 하여 뱀과 호랑이를 제압할 수 있었다. 적금도를 차고 붉은 비단으로 머리를 묶고 다녔는데, 서서 운무를 일으키고 앉아서 산하를 만들 수 있었다. 노쇠해지자 기력이 줄어들고 술을 지나치게 마시어서 그 법술을 행할 수가 없게 되었다. 진말(秦末)에 동해에 흰 호랑이가 나타나자 황공은 곧 적도를 가지고 가서 제압하려 하였으나, 법술이 통하지 않자 호랑이게 죽음을 당하였다. 관중(關中) 지방의 민간에서는 그것을 가지고 놀이를 만들었고 한제(漢帝)도 그것을 취하여 각저희(角抵戱)로 삼았다.
위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동해황공〉은 가무 중심의 놀이라고 할 수 있다. 호랑이를 잡으려다 오히려 잡혀먹인 도사의 이야기를 춤과 노래, 각저로 꾸민 이 놀이는 짧지만 줄거리를 갖추어 가무희로 불린다. 남북조(南北朝)와 수대(隋代)에 이르면 이러한 민간가무는 더욱 다양해지고 당대(唐代)에는 전문 기예인(技藝人)들이 이들 가무를 계승 발전시켰고, 북송(北宋)에 이르러서는 〈아고무 鼓舞〉, 남송(南宋)에는 〈한선 旱船〉 〈죽마 竹馬〉 〈화고 花鼓〉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무들은 노래와 춤으로써 특정한 인물을 표현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완벽한 극적 줄거리를 구성한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