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기 신라의 세계관으로 본 국내외 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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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전성기 신라의 세계관으로 본 국내외 정세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전성기 신라의 세계관으로 본 국내외 정세
Ⅰ. 들어가는 말
Ⅱ. 본론
1. 전륜성왕의식으로 본 국내정세
2. 호국불교로 본 대외정세
3.지증왕 대의 국내외정세
4.법흥왕 대의 국내외정세
5.진흥왕 대의 국내외정세
6.진덕왕 대의 국내외 정세
Ⅲ. 나오는 말
Ⅰ. 들어가는 말
신라 천년의 기간 중 신라사에 있어서 중요하고도 많은 변화가 일어난 시점을 중심으로 하여 당시의 사상과 대외관계에 대하여 알아볼 것이다. 사상이라는 것이 어느 시대에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는 것들도 있지만 사료를 통하여 당시의 사상이 바탕이 된 대외관계를 찾아보거나 대외관계가 이루어지는 속에 숨어있는 당시의 사상을 생각해보았다.
Ⅱ. 본론
1. 전륜성왕의식으로 본 국내정세
원래 불교의 초기 경전에는 불법(佛法)의 바퀴를 돌림으로써 천하를 정복해가는 위대한 왕이 있으니 그를 일컬어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고 한다. 전륜성왕 중에는 금륜(金輪)·은륜(銀輪)·동륜(銅輪)·철륜(鐵輪)이 있는데, 값이 비싼 쇠붙이의 순서대로 이름을 붙인 것인데 부처님도 이 같은 전륜성왕의 가계에 속한다고 한다. 진흥왕 27년(566)에는 두 개의 절이 낙성되었고 특히 이 해에는 장자인 왕자 동륜(銅輪)을 태자로 삼았는데, 여기서 태자의 이름 ‘동륜’에 주목해볼 수 있다. 동륜은 진흥왕 12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데, 진흥왕 12년은 남한강 유역 고구려의 10개 군을 빼앗은 해이기도 할 만큼 왕의 자신감이 충만한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 태어난 왕자의 이름을 지으면서 위대한 정복왕인 전륜성왕 이아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리 없으며, 나아가 자신과 자신의 앞대 왕인 법흥대왕의 존재에도 생각이 미쳤을 것이다. 여기서 진흥왕은 불교를 최초로 공인하여 크게 일으킨 법흥왕을 법륜으로, 자신을 은륜의 전륜성왕으로 생가하고, 왕자의 이름을 동륜으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진지왕의 이름을 전륜이라 한 사실은 전해지지 않고 사륜(舍輪)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
제25대 사륜왕(四輪王)의 시호(諡號)는 진지대왕(眞智大王)으로, 성(姓)은 김씨(金氏), 왕비(王妃)는 기오공(起烏公)의 딸 지도부인(知刀夫人)이다. 대건(大建) 8년 병신(丙申; 576, 고본古本에는 11년 기해己亥라고 했는데 이는 잘못이다)에 왕위(王位)에 올랐다. 나라를 다스린 지 4년에 주색에 빠져 음란하고 정사가 어지럽자 나랏사람들은 그를 폐위시켰다.
이라 이름했다고 나오는데, 이러한 이름은 전륜성왕 중에는 없는 것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철을 쇠라고 부르는 만큼 신라시대에는 쇠륜이나 사륜으로 불렸던 것이 아닐까 하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이런 진흥왕 때 크게 강화된 신라의 왕이 곧 전륜성왕이라는 의식은 정치적으로 신라왕의 권력과 권위를 강화하기 위한 이념이었으며, 내용적으로 여러 정치집단을 국왕 중심으로 통합해가는 논리였다. 전륜성왕 의식은 삼국 간의 전쟁이 격화 되면서 고구려·백제 와 싸워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줄 논리로서, 또 왕은 정복을 통한 통일과 그에 따른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했다. 이런 이유에서 신라왕은 전륜성왕이 되어야 했고, 왕과 왕실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왕실이 곧 석가모니의 일종이라는 진종설(眞種說)이 나오기에 이르렀고, 성골이라는 신분의식이 싹트기 시작하여, 결과적으로 종교·신분적으로 지나치게 자만심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진흥왕 때의 황룡사의 창건, 선덕여왕 때의 황룡사 9층탑과 연관된 설화 등을 보면 이런 전륜의식을 전파하기 위한 무리한 논리의 비약을 시도하여 허점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라왕이 곧 전륜성왕이라는 의식은 비록 불법을 통해서라는 단서가 붙긴 하지만 전륜성왕은 결국 천하를 통일한 왕이므로, 이를 자부하는 왕은 천하를 통일해야 할 책임을 지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이 싹트던 법흥왕 때는 아직 정치세력들을 통합하는 과도기여서 전륜성왕의 파급력의 효과는 크지 않았었지만, 진흥왕 때, 한강유역을 차지하게 되면서, 신라가 전륜성왕을 자부하는 왕이 있다는 것은 국경을 맞대고 있던 고구려와 백제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변수가 되었다.
진흥왕은 태왕을 자부하며, 자신의 아들까지 전륜성왕의 이름을 본떠 지을 만큼 통일의 염원이 컸었다. 이러한 전륜성왕 의식으로 하여 삼국간의 전쟁은 종래의 정치·경제적 이익을 얻거나 살아남기 위한 전제의 차원에서 삼국이 경쟁하는 이 천하를 신라가 통일하려는 강력한 의지가 개입된 단계가 되었다. 진흥왕의 이런 의식은 한강유역점령과 자신의 권위를 드높이는 황룡사를 건축하기 시작하고, 지속적 영토 확장, 순수비 건립, 화랑도의 정비 등으로 나타났으며, 강력한 왕권을 기반으로 신라가 통일을 할 수 있게 한 기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