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몽양 여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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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문과학 몽양 여운형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이념의 잣대로 그를 논하지 말라!!!!!!!!
논하지 말라!!!!!!! 몽양 여 운 형
1.해방전후의 여운형의 활약(1944~1947)
*필자가 판단할 때, 여운형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대목은 바로 해방전후의 그의 활약상이 다. 가장 극심한 혼란기 동안 그가 보여준 행동과 올곧은 신념이야말로 그가 위인으로 존 경받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1944년 9월 일본의 패전을 예상하고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의 지하조직을 전국적으 로 조직하여 그 위원장에 취임하여 광복에 대비하였으며, 10월에는 양평 용문산 속에서 농 민동맹(農民同盟)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위원장이 되었고, 9월에는 조선 인민공화국을 선포하여 스스로 부주석에 취임하였으며, 10월에는 인민당을 결성하여 당 수직에 앉았다.
그러나 인민당은 인민공화국 선포,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1945.12.27.), 민주주의민족전선 미소공동위원회 등에 대한 노선에서 공산당과 보조를 같이하였고, 또한 1946년 5월 좌우 합작운동이 일어났을 때 좌익을 대표하여 중간적인 위치에 선 일이 있다.
이 좌우합작운동은 우익의 강력한 반탁운동과 공산당의 반대에 부딪혔는데 북한공산당의 지령을 받은 조선인민당의 비여운형계가 조선공산당·남조선신민당과 합동하여 남조선노동 당을 결성하였던 것이다.
이에 여운형은 1946년 10월 15일 신민당과 공산당과의 공동명의로 ‘좌우합작지지’, ‘입법 기관설치 반대’라는 3당합동 결정서를 발표하고 11월 12일 사회노동당을 조직하였다. 그 러나 당시의 정치정세로서는 사회노동당에 대한 좌우양쪽의 공격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 어 큰 활동은 하지 못하였다.
미소공동위원회가 다시 열리게 됨에 따라 1947년 5월 24일 사회노동당을 근로인민당으로 개편하였는데 밖으로는 영국 노동당좌파의 노선을 모색하였고, 안으로는 좌우 중간노선을 모색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선은 현실적으로 정치적 입장을 강화시켜 주기가 어려 웠다. 또, 이러한 노선의 추구 때문에 자연히 인물본위의 정당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이라는 19세의 청년으로부터 2발 의 권총사격을 받아 절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