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문학에 나타난 유교의 흥과 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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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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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조선시대 문학에 나타난 유교의 흥과 멸
Ⅰ. 서론
종교는 어떤 것이든 사회구성원과 떨어져서는 존재할 수 없다. 조선시대의 ‘유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유교가 종교로서 굳건히 자리잡을 수 있기 위해서는 단지 유학자들의 출세의 수단인 학문의 대상이 되는 것만으로는 안 되며, 더욱 폭넓은 지지 층을 필요로 한다. 그래야만 유교가 국가정치이념으로서 확고하게 자리 매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교를 하층민에게까지 확대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백성들에게 있어 ‘학문의 대상이 되는 유교(학)’는 관심대상과 거리가 멀다. 유교가 백성들에게 관심을 끌려면, 그것은 ‘생활’속에서 접근하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서민들의 일상 속에서 보다 받아드리기 쉬운 방법으로 유교가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유교가 쉽게 서민들에게 다가설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이야기’ 즉 ‘전’이라고 표방한 소설 조동일. 한국문학통사3 (지식산업사. 1994)
이나, ‘소설’ 등을 이용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유교가 서민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노력을 살펴보기 위하여 조선시대 활발히 지어진 열녀전을 통하여 이것이 유교의 확산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아보도록 할 것이며, 조선후기 소설인 ‘玉娘子傳’을 통해 조선후기 유교가 어느 정도 확산되어 영향을 미쳤는지를 확인해보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이렇게 서민들에게 확산되어간 유교가 조선후기에는 이미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음을 역시 ‘옥낭자전’을 통해 살펴볼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조선시대의 유교는 언제나 문학과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발전하고 쇠퇴해 갔으며, 이는 문학작품 속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을 알아볼 수 있다.
Ⅱ. 본론
1. 서민들과는 너무 먼 ‘유교’
학문의 대상으로서의 유교는 대중들에게는 관심 밖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유교’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은 이상, 유교는 더 이상 지배 계급에게만 국한되어질 수 는 없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백성들로 하여금 유교적 질서를 잘 알도록 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국가에서는 훈민정음 창제라는 대대적인 사업을 벌이고, 유교와 관련하여 백성들에게 가르칠 내용에 대해 활발한 언해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의 한 예로 오륜행실도 이민수역, 오륜행실도(을유문화사, 1976), 4쪽~5쪽
를 들 수 있겠는데, 세종 조에 편찬한 오륜행실도는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의 두 책을 합해서 만든 것으로 유교에서 사람의 행하여야 할 다섯 가지의 도(道)에 관한 본받은 만한 사람들의 행실들을 다수 싣고 있다. 여기서 오륜이란 말은 원래 명나라 심역(沈易)의 〈오륜시〉와 선종(宣宗)의 〈어제오륜서〉에 처음 나오는 것으로, 사람이 항상 행하는 다섯 가지 도(道), 즉 부자의 친함, 군신의 의리, 부부의 분별, 장유의 차서, 붕우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오륜행실도에 수록된 이들은 모두 효자, 충신, 열녀, 형제, 붕우의 관한 부분에다가 종족, 사생(師生)을 더하여 7부분에서 윤리적으로 본받을 만한 이들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건 하나가 끝날 때마다, 삽화를 그려 넣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세종 조때 ‘오륜행실도’ 의 편찬을 위한 노력이 왜 이루어졌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는 편찬 의도에도 분명히 나타난 것처럼, 사람들의 윤리적 교화를 위한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더 나아가 그림까지 그려 넣고, 언해까지 한 점에서 하나 더 생각할 것은 ‘유교’라는 것을 단지 다스리는 사람들만이 공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피지배층 곳곳에까지 전하고자 하는 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에는 국민을 효과적으로 통치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있음은 자명하다. 세종 조의 한글창제의 이유 중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가 ‘훈민(訓民)’ 즉, 백성을 가르치기 위한 것, 가르쳐서, 국가의 통치를 더 수월하게 하기 위함임을 구지 상기하지 않아도, 국가에서 국민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음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보기 좋은 윤리 책이 나오고, 한글이 창제되어, 언해사업이 활발해 진다고 해도, 백성들이 찾아 읽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렇다면, 유교가 백성들 하나 하나에 까지 침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이에 가장 효과적인 교량적 수단으로서 채택되어진 것이 ‘소설장르’일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가장 눈에 띄는 현상으로 바로 소설의 출현을 들 수 있는데, 이 가운데, 특히 윤리성을 표면에 내세운 소설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멀기만 했던 국가 이념인 유교가, 지방 백성들에게까지 영향력을 줄 수 있었던 데에는 문학’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다른 각도에서 보면, 문학 역시, 당시 유교라는 이념을 배제하고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2. 서민들에게 다가가는 유교
국가에서 유교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했겠으나, 유학자들이 학문으로서 다루는 유교를 통해 서민들에게 유교질서 다시 말해서 충, 효 등을 인식시키고 따르도록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런 것들보다는 위에서 말한 오륜행실도 등의 윤리서가 주는 내용이 서민들에게 더 받아드려지기 수월했을 것이다. 즉 정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이들의 마음을 국가에서 의도하는 방향 즉 전국적으로 유교적 질서체제를 갖추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맞는 방식으로 ‘유교’를 인식시켜야 했다. 이에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바로 유교질서를 쉬운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일 것이다. 전(傳)을 표방한 소설들과 소설 등이 바로 유교가 서민들과 가까워지도록 하는데 교량적 역할을 담당했다. 즉 사람들은 전이나 소설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유교질서에 대해 내면화하였으며, 이런 노력은 조선 후기, 지방 곳곳에까지 유교적 질서가 확산되도록 하였을 것이다. 우선 조선시대 유교가 어떻게 확산되어갔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열녀전(烈女傳)’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