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가집에 대하여 - 『청구영언』과 『가곡원류』를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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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후기 가집에 대하여 - 『청구영언』과 『가곡원류』를 중심으로 -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조선후기 가집에 대하여
- 『청구영언』과 『가곡원류』를 중심으로 -
Ⅰ. 18세기 초 (『청구영언』)와 19세기 후반 (『가곡원류』) 가집의 변화
1. 『청구영언』
조선시대 금보의 출현은 많은 사람들이 음악의 연주와 향유를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금보는 악보 위주로 짜여있었기에 노래를 부르는 가창자들에게는 악보에 맞추어 노래할 수 있는 작품들을 모은 가사집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시대상황을 보았을 때 『청구영언』의 편찬은 당대의 예술사적 요구에 대한 대응이라 할 수 있다.
1) 『청구영언』 소개
1728년(영조 4)에 여항인 여항(閭巷): 백성의 살림집이 많이 모여 있는 곳
여항인 (閭巷人): 본래적 의미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일반인을 뜻하나 『청구영언』에서 나타나는 여항인들은 대부분 조선시대 양반(兩班)과 양인의 중간에 있는 중인계급으로 나타난다.
이자 가창자인 김천택(金天澤)에 의해 편찬된『청구영언』은 현전하는 최초의 가집으로 『해동가요(海東歌謠)』『가곡원류(歌曲源流)』와 아울러 3대 가집으로 꼽히는 책이다. 고려 말엽부터 편찬 당시까지의 시조들을 모은 것으로 평시조와 사설시조를 아울러 59명의 작가와 580수의 작품을 수록하고 있다. 필사본은 소실되어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소실 전 1948년 조선진서간행회(朝鮮珍書刊行會)에서 활자로 만들어서 간행하였다. 이것을 『진본청구영언(珍本靑丘永言)』이라 일컫는다.
『청구영언』은 ‘서문 - 작품(초중대엽~만횡청류) - 발문’의 구성으로 짜여있으며, 당대의 연행 현장에서 불리던 작품들을 가창에 유용하도록 가곡창의 곡조별로 배열하고 편찬하였다. 이러한 배열에서 특정 작품이 특정 곡조로 배속되어 불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청구영언』은 서문과 발문을 청탁하여 싣기도 하고, 작품을 곡조별로 배열하면서 일부분에서는 작가별, 주제별로 배열하여 수록하는 등 사대부들의 문집에 비견될 정도의 짜임새 있고 조리 있는 면모를 지니고 있다.
2) 『청구영언』과 18세기 시조문학
『청구영언』에 제시된 가곡의 곡조들은 18세기 전반의 음악적 변화를 그대를 수용하고, 조선 후기 시조사의 흐름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러한 점에서 『청구영언』은 가집이 편찬된 18세기의 시조사와 음악적 변화를 밝혀주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청구영언』의 수록 작품의 수효로 보아 이 당시에 중대엽과 북전 계열의 곡조는 연행 현장에서 그리 활발하게 불리지 않았다는 추측을 해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가장 활발하게 불리어진 가곡의 곡조는 삭대엽 계열이고, 그 중에서도 ‘이삭대엽(二數大葉)’이 가곡의 중심을 이루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 가곡의 중심인 이삭대엽 속 특징을 살펴보아 당시 시조사의 흐름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시조의 작가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