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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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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성리학
유교-성리학은 ‘성명·의리의 학(性命義理之學)’이다. 성명은 천리이자 본성이며 리(理)이다. 삶의 존재 근거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하는 것이 천명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천명에 따라 부여받은 성질 아마도 재능이나 혹은 성품 등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누구나 어린 시절 고민하는 것이 이것이라고 생각된다. 내가 잘하는 것이 무엇일까?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내가 살면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직업을 이야기할 때 천직이라는 것은 어느 순간부터 우리에게 유토피아가 되어버렸다. 왜일까? 우리가 자유주의를 선택해 이익에만 밝은 소인이 되어서? 마르크스의 말처럼 부르주아가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해서? 그 어느 것도 답이 되어줄 수 있는 시대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인류의 그 어느 시기보다도 사람들은 교육되었고 교화되었다. 그 어느 시기보다 풍족하다. 하지만 어느 시대 못지않게 살아가기는 힘들다. 유학이 주장대로 이제는 통치자가 만백성의 의견을 들을 수 있다. 그런대 왜 일까? 그 모든 질문은 이 주제에 담겨있다. 바로 가기가 무엇인지 모른다.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고 있다. 형식만은 안다. 자신이 무엇인지 자신의 명을 모르니 최선을 다할 수 없다. 최선이라는 개념이 모호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성리학이 말하는 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제사를 해도 왕은 왕다운 최선을 위정자는 위정자다운 최선을 백성은 백성다운 최선을 하면 된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자신인지 모르고 비어있는 자신을 닦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인이 되지 못하니 의할 수도 없고 의하지 못하니 예할 수도 없다. 그러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지에는 결코 다다를 수 없다. 성리학은 바로 이런 형식에 얽매인 상황을 비판하며 나온 학문이다. 진짜 자신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학문이다. 성리학의 배경이 어떤가? 송 태종대에 문치정책 중 과거제시행에서 기송(記誦)에만 치중하는 유생들의 -지금으로 말하면 전 인류라고 말해도 무방하다고 생각된다. 아니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우리나라의 국민 모두는 포함된다고 생각된다.- 행태를 비판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지 않은가? 우리가 누군지 안다는 것은 이러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난 아직 내 기질과 본성을 구분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수기가 필요하다. 내 기질은 날로 변해 가는데 여기에 가려 내 본성은 보이지 않는다. 아직은 학생이고 배움에 힘쓸 수 있는 상태이다. 수기에 대한 노력을 개을리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사탁함은 언재나 본성을 가린다. 나는 아직 게으르고 거만하며 무지하여 보이는 것이 없다. 이러한 연유는 아직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물을 궁구 할 필요가 있다. 격물하여 치지하고 성의 할 수 있다면 정심하게 될 것이고 그럼 수신에 다다를 수 있겠지 사람들은 누구나 치인할 때가 올 것이다. 크게는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작게는 가정을 다스려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이러한 것은 제가로 들어나는데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직 준비가 많이 부족하다. 수기는 끝없이 다가오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천명에 따라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공자의 말을 빌리면 50에 지천명(知天命) 60에 이순(耳順) 70에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라는 것에서 그것이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이론적으로 아는 것은 별로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이런 것은 단순한 형식으로 위에서 말한 잘못이라고 생각된다. 지금까지 너무 조급했다는 생각도 든다. 나름 철학을 좋아했다. 철학은 나의 락(樂)이었기에 그래서 더 조급했다. 1학년 때는 아마도 그런 것이 많이 묻어 나왔다고 생각된다. 앞으로도 조바심이 나고 약해질 때는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러지 않도록 계속해서 수양해야할 것이다. 유학이란 계속해서 자신을 수양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다.
밝은 덕은 충분히 연구되었고 그 것을 널리 알리는 것은 거의 완성이라고 생각된다. 교육은 형식적으로 너무도 잘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 실상은 공이며 허이다. 이제는 자료도 많고 오히려 좋은 보다 원형에 가까운 자료를 찾는 것이 과제가 되었다. 명명덕은 밝은 덕을 밝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명명덕이 더욱 빛이 날 때라고 생각된다. 밝힌다는 것은 계몽과 같은 것이라 생각된다. 무지의 어둠으로부터 깨어나는 것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더 노력해야 할 때인 것 같다. 유학은 기본적으로 자주성을 중시한다. 우리는 너무도 교육에 관심이 높다. 그래서 우리는 기대한 만큼 결과가 보이길 원한다. 보이지 못하면 그 기대를 배신하는 것이 되므로 우리는 그 형식에 더 치중하게 된 것이라는 말이 많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안다. 보이지 않는 것 그 속에 있는 것이 어느 것 보다 고결하고 밝은 것일 때 그것은 진실로 가치 있다는 것을 그러나 그러지 못 한다. 기대가 너무도 크기 때문에 이에 따른 예가 요구된다. 그러나 그전에 의와 인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유교의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는 중용이다. 서양적 중용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든 열려있는 가능성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으며 조화를 이루는 것 교육에 대한 열정도 이러한 조화가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조화됨이 친민이며 신민이라고 생각된다. 본을 바로잡고 성을 알면 리가보이고 그러면 지어지선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것에 다다르기 위해 중요한 것은 역시 수양이다. 수양은 교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여러 성현들이 교화를 중시했고 우리나라에서는 교의 예악형정 중 교육에 대한관심이 가장 크다. 그러나 본이 아닌 기에 대한 관심이 더 크다. 본이 되어야할 예의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는 형식이 되었고 그 정신과 마음이 아닌 기술이 그 본이 되었다. 예를 하며 그에 따라 오는 이득을 생각하고 예를 하는 것이 수단이 되어버려 그 뜻을 잃어버렸다. 인의예지가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어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성리학의 입장에서 이러함은 기에 가려 본을 보지 못한 기학을 비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대학에 있는 구절을 보면 물유본말하고 사유종시하고 지소선후면 즉근도의라는 말이있다. 우리는 우선시되어야할 것을 우선시하고 이를 정확하게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뜻 잃은 형식에 익숙해지니 자연스럽게 기에 더 눈이 갈 것이며 실학과 서양의 문물의 즉효성에 현혹되어 기학이 발전하였다. 기학에서 말하는 기란 것이 그 생명력과 같은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니체처럼 이러한 생의지를 잘 살릴 수 있게 해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기학에서는 리와 기를 혼돈하여 그 사용을 잘 못 하고 있다. 이처럼 기학은 그 뜻을 잃고 기가 본이 되었다. 서경덕과 같은 학자들이 그렇다. 서경덕은 자득한 지식을 진리로 생각하는 것 같다. 이이의 말처럼 그의 기를 극한까지 탐구한 것은 높이 살만하나 이와 기의 구분이 우선시 되어야할 것이다. [우주만물의 궁극적 실체를 기(氣)로 보고, 모든 현상세계는 기의 운동과 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는 철학체계. 학자에 따라 내용은 약간씩 차이가 있으나 다음 몇 가지 공통성을 갖는다. 먼저 이 세계의 궁극적 실체를 기로 규정하고 만물의 현상적 전개는 기 운동의 소산이라고 본다. 또한 기 운동과 작용의 원인을 기 자체에 있다고 보며, 근원적인 기는 영원히 소명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理)는 기의 내재적 법칙성 내지 속성으로 격하되고 독립적 실체성이 부정된다.] 10주차 발제문 중 기철학 정의 부분
를 보면 기는 움직이므로 그 운동과 작용에 의하여 들어나는 것이다. 작용원인인 이는 기에 내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석여있다고 생각된다. 기가 움직이는 연유가 거기에 있다. 원인은 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에 있는 것이다. 기는 변하고 변하면서 순환한다. 그래서 불변하고 영속한다. 그러나 그것은 리(理)다. 그러한 자연스러움이 리(理)라는 것이다. 봄이고 가고 여름이 오고 가고 가을이오고 가을이가며 겨울이오고 겨울이 간다. 이러한 것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은 기에 연유한 것이 아니라 리(理)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기는 리(理)에 따라 움직이는 것뿐이다. 리도 기도 분명히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불상리이기 때문이다. 서로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기학은 이러함을 간과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서로 구분되는 이유는 존재하는 것끼리 연결하기 위해 존재하기 위해 필요하나 불상잡하여 서로 석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이 중용이라고 생각된다. 서로 조화를 이루고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 기학은 이러함을 잊고 기에 치우친 것이다. 성리학이 『중용』을 주요 저서 중 하나로 생각하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서로 치우침이 없이 과한 것이 있다면 균형을 맞추는 것인데 동양의 철학의 정수는 이 순환과 조화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는 나에게 너무도 어려워서 실제에 적용하는데 아직 혼란이 있다. 과제를 위해 혹은 어린시절의 고민에서 자신의 기질과 본성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움직이는 기는 너무도 직접적으로 다가오고 화려하여 내 감각을 모두 사로잡는데 움직이지 않는 본성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기의 움직임 속에서 리(理)를 찾기 위해 더 정진해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누가 말했듯 촉이 서야하는 것인지 직관할 수 있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이모든 것을 온전히 이해했을 때 깨달아 지는 것인지는 아직도 혼란스럽다. 각 국에 많은 식물이 있다. 같은 종류라도 그 형질이 확연히 다른 것들도 많다. 이는 기질이 다른 것 때문일 것이다. 내 상황에 맞는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고 기질도 더 살펴보아야겠다. 그러나 확고한 리의 탐구가 우선 되어야할 것이다. 리는 기준이기 때문이다. 기철학의 탐구의미는 이러한 행보 속에서 그 중요함을 알 수 있다. 환경에 따라 변하지 않고 중심을 지켜야하지만 맹모삼천지교에서 들어나 듯 본성이 잘 발현되기 위해서는 환경적 요인도 중요하다. 정약용의 말처럼 이러한 기질(혈기)을 잘 다스리는 주체적인 모습이 필요한 것이다. 현실적으로 존천리는 가능하지만 거인욕에 대해서는 아직 의문이 있다. 많은 기철학 사상가들이 말하듯 이러한 기는 없앨 수는 없을 것이다. 없앤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 기질이 있음은 본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