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다 1920년대 만주 연해주 일대의 민족 독립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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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문과학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다 1920년대 만주 연해주 일대의 민족 독립 운동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다.

◇◆ 목 차 ◆◇
1. 독립전쟁을 벌이자.
2. 봉오동에서 일본 정규군을 무찌르다.
3. 일제, 훈춘 사건을 조작하다.
4. 독립군, 청산리에서 대승을 거두다.
5. 독립군, 시련을 겪다. ― 경신참변과 흑하사변
6. 자치 정부를 세우다.
7. 민족 유일당을 세우려 하다.
1. 독립전쟁을 벌이자.
일제강점 하 민족주의자들은 국내외의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항일 운동을 벌였다. 비록 그들은 활동 공간이 달랐지만, 대체로 독립전쟁론에 입각하여 활동하였다. 독립전쟁론이란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독립군을 양성하는 한편, 정치 경제적인 실력을 양성하여 충분히 독립할 실력을 갖추었다가 미 일, 중 일, 러 일간에 전쟁이 일어나면, 이를 호기로 삼아 일제를 상대로 ‘자력으로 독립전쟁을 일으켜 독립을 쟁취한다.’는 전략방침이다. 일제를 투쟁대상으로 한 독립전쟁론은 전략단위의 문제로서 무장투쟁과 교육진흥 식산흥업으로 압축되는 실력양성이란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주지역에서의 독립전쟁론은 시기에 따라 변화를 겪는다. 특히 거족적인 3 1 운동의 실패는 많은 민족 운동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비폭력 평화적 방법으로 일제의 잔혹한 탄압에 맞서 민족의 해방을 달성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기 때문에, 독립 운동의 노선과 방략을 둘러싸고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1919년 중반 경부터 일부 민족 운동가들은 임시정부가 내세운 청원에 의거한 외교론을 비판하며 독립 전쟁 노선을 바탕으로 무장 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이동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3 1 운동이 대규모로 일어났지만 비무장의 대중운동이었기 때문에 외국에서는 이를 ‘국내의 소란’ 정도로 인식하며, 파리강화회의에서도 서구 열강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정도에 불과할 것이므로 독립 달성은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그래서 더욱 대대적으로 무기를 모아 일본과 대항하여 싸우면서 열강으로부터 “하나의 교전단체로 승인”받으면 목적의 대부분이 달성될 것으로 보고 이때의 교전단체는 국제연맹의 승인을 받는 단체가 아니라 반일연합전쟁에 참가한 국가(민족)의 일원으로서 자격을 갖춘 단체를 의미한다.
, 무장투쟁에 바탕을 둔 교전단체론을 주장하였다. 이동휘의 이러한 무장투쟁에 의한 독립전쟁론은 홍범도 등에 의해 적극적으로 실천되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우리 동포들이 많이 이주해 있고 당시까지 일제의 침략 정도가 상대적으로 미약하였던 만주 지역을 독립 전쟁의 근거지로 한 투쟁이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 초반 무렵 북간도 지역(대한군정서, 대한국민군, 대한군무도독부, 대한북로독군부, 대한의군부, 훈춘한민회, 대한광복단, 대한신민단, 대한의민단 등)과 서간도 지역(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대한독립군비단, 광복군총영)에는 70여 독립군 부대가 편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화력증강(만주 연해주 국내의 동포가 헌납한 군자금으로 산 체코제 무기)과 군사훈련(북간도의 사관연성소와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을 바탕으로 국내진입작전(유격전과 기습전, 일제 관공서 파괴 등 대표적 인물이 홍범도 최진동 안무 김좌진 등)을 전개하여 관공서를 습격하고, 일본 군대나 경찰과 전투를 벌였는데, 이렇게 수많은 항일단체와 독립군단이 정비 편성된 것은 항일독립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하지만 여러 갈래의 군단이 도처에 편성되어 각기 고립 분산적으로 항일전을 수행하였으므로 전력의 분산이라는 한계를 노출하였다.
2. 봉오동에서 일본 정규군을 무찌르다.
봉오동전투는 1920년 6월 7일 항일 명장 홍범도를 사령으로 한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 :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대한국민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등의 연합부대) 부대가,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두만강을 넘어온 일본군 제19사단 야스카와[安川二郞] 소좌가 거느린 부대를 참패시킨 전투이다.
1920년대 초반 무렵 만주지역에는 70여 독립군 부대가 편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의 국내 진입 무장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국경의 일본군 수비대는 수세에 몰리게 된다. 그해 6월 4일 삼둔자(三屯子)싸움에서 일본군 남양수비대가 크게 패하는데 이는 대규모 전투의 계기가 되었다. 함북 나남에 주둔한 일본군 제19사단은 야스카와 소좌가 인솔한 보병 및 기관총대 1개 대대로 월강추격대대를 편성하였고, 독립군을 추격하여 간도로 들어간 대대는, 6월 7일 안산(安山) 후방고지, 고려령두 등에서 독립군의 기습을 받아 상당한 타격을 입었으나 봉오동까지 독립군을 추격하였다. 당시 봉오동은 100여호의 민가가 있는 독립군 근거지의 하나로 대한북로독군부라는 연합부대가 편성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서였다.
봉오동 골짜기와 주변 산에 약 700~900명의 독립군이 집결하였다. 일본군 1개 대대가 독립군을 추격하여 봉오동에 접근한다는 보고를 받은 홍범도는 봉오골의 주민을 대피시키고 포위망을 구성한 다음, 제2중대 제3소대 제1분대장 이화일에게 고려령에 대기하여 일본군을 유인해오도록 하였다. 고려령에서 일본군 전위중대가 독립군의 공격을 받아 패배하였지만, 본대는 대오를 정비하여 봉오동 골짜기의 독립군 포위망 속으로 들어왔다. 홍범도의 공격 명령에 따라 매복한 독립군이 3면에서 집중사격을 가하자, 일본군은 3시간가량 응사하다가 막대한 희생자를 내고 후퇴하였다. 강상모가 지휘한 제2중대는 도주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또다시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