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프로테스탄트 수용과 밴드 - 구마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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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프로테스탄트 수용과 밴드 - 구마모토
1858년 미국네덜란드러시아영국프랑스 등과 차례로 불평등한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일본은 외국인 거주지에 한해 종교 활동의 자유를 보장했다. 그리하여 여러 교회, 교파들은 선교사를 일본에 파송하고 외국인 거류지에서 활동을 개시했다. 1873년 2월에는 금교령의 철폐와 함께 금지되었던 기독교 활동이 묵인되자 선교를 위한 선교사의 수도 급증하였고 그 활동도 다양해졌다. 그리고 기독교의 씨앗이 일본의 문화적 사회적 토양 가운데서 싹트기 시작했다. 도히 아키오, 김수진 역,『일본기독교사』, (서울: 기독교문사, 1991), 16-17.
1. 구마모토의 기독교 수용과 구마모토 밴드 형성
구마모토의 부호들은 막부정권이 붕괴된 후 스스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인재를 양성한다는 목적하에 1871년 미국인 젠즈(L. L. Janes)를 초청하여 구마모토 양학교(態本洋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그를 영접했다. 김수진, 『일본기독교의 발자취』,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3), 39. 도히 아키오는 메이지 시대 초기의 기독교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음에도 기독교에 입교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던 것에 대해서 이를 유발하는 사회적 정세나 조건이 있었다고 말한다. 사회적 정세로서는 당시 일본에 있어서 서구 문명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 풍조와 이러한 풍조에 응할 수 있었던 고도의 지식과 교육적 식견을 가졌던 선교사들, 기독교주의의 교육가들을 말하면서 이들 통한 기독교적 영향을 설명한다. 사회적 조건으로는 좌막파(佐幕派) 출신의 귀족들로서 메이지 유신에 의해서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번벌(藩閥) 출신자와 같이 장래가 보장되지 않은 계층을 설명했다. 자신들의 곤경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 서양학에 뜻을 두고 선교사와 교육가들로부터의 배움을 통해 자신의 생활 안정과 영달, 가문의 재흥과 옛 막부의 부흥을 원했다는 것이다. (도히 아키오, 김수진 역,『일본기독교사』, 43-45.) 이렇게 본다면 구마모토양학교의 설립과 여기에서 교육을 받았던 생도들의 기본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서양의 지식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젊은이들의 무용(武勇) 정신을 고무하려고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며 남북전쟁 때 포병 대위였던 젠즈를 초청한 것이다. 젠즈는 구마모토양학교가 설립되고 폐교될 때까지 5년간 혼자서 생도들을 가르쳤는데 가라타니 코오진 외, 송태욱 옮김, 『근대 일본의 비평』, (서울: 소명출판, 2002), 74.
, 1873년경부터는 기독교에 흥미를 가진 생도들을 위해서 자택에서 매주 토요일 성서연구회와 기도회를 열었다. 野和夫,『日本キリスト敎史をむ』, (東京: 新敎出版社, 1997), 84.
그리하여 1875년 말경부터는 신앙을 고백하는 자가 30-40명에 이르렀고, 기도회와 성서 연구를 통하여 신앙의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다. 1876년 1월에는 35명의 청년들이 하나오카 산에 올라가 거기서 봉교(奉敎)를 서약했다. 사와 마사히코, 『일본기독교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5), 93.
이에 의하면 그들은 기독교를 알고 나서 감탄하였으며, 이를 황국(皇國)에 널리 전하여 모든 백성을 몽매에서 깨우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보국(報國)의 의지를 가진 자로서 자신의 신명을 다해 기독교의 공명정대함을 분명히 추구할 것이라는 의지도 엿볼 수 있다.
이것은 기독교 입신의 대담한 선언이었기 때문에 양학교 내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생도와 젠즈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높았고, 그들의 가족 중에는 신앙을 버리지 않으면 죽어 조상에 용서를 빌겠다는 모친이 있을 만큼, 그들은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압박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구마모토에 있을 수 없게 된 생도를 위해 젠즈는 도시샤영학교(同志社英學校)에 편지를 썼고, 대부분의 생도들은 도시샤영학교로 옮겨 계속해서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도시샤에서 그들은 구마모토 밴드라고 불렸다. 사와 마사히코, 『일본기독교사』, 93.
구마모토 밴드로 불렸던 이 그룹에서 기독교계와 교육계를 비롯해 넓은 분야에서 활약한 사람들이 나왔다. 에비나 단조(海老名彈正), 고자키 히로미치(小崎弘道), 미야가와 쯔네테루(宮川經輝) 등이 구마모토 출신이다. 野和夫,『日本キリスト敎史をむ』, 84.
구마모토 밴드가 교토에 있는 도시샤와 연결되면서 일본조합교회 지도자들이 양성되었고, 이로써 일본에 조합교회가 자리잡게 되었다. 김수진, 『일본기독교의 발자취』,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