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일본 기독교의 이해와 분석

 1  인문과학 일본 기독교의 이해와 분석-1
 2  인문과학 일본 기독교의 이해와 분석-2
 3  인문과학 일본 기독교의 이해와 분석-3
 4  인문과학 일본 기독교의 이해와 분석-4
 5  인문과학 일본 기독교의 이해와 분석-5
 6  인문과학 일본 기독교의 이해와 분석-6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인문과학 일본 기독교의 이해와 분석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일본 기독교의 이해와 분석
목차
1. 일본 기독교의 현황
2. 일본 기독교 역사
3. 일본 기독교 분석-정치, 사회, 문화적 접근
4. 일본 기독교 활동
1. 일본 기독교의 현황 이호기, 「일본 선교 전략에 대한 연구」, (고신대학교 선교대학원 2002), p.31
1991년판 「기독교 연감」에 의하면 현재 일본에는 119교단이 있다. 교회 수는 개신교가 7,266개, 천주교가 1,177개이다. 교역자는 개신교가 1만 829명, 천주교가 1만 330명이다. 그리고 신자 수는 개신교가 65만 2,401명, 천주교는 43만 9633명이 되어 총 109만 2,034명이 기독교인이다. 일본의 신학교는 83개이다. 그 중에 학생이 20명도 안되는 곳이 적지 않다. 신학교는 대부분 자유주의 성향이 강하다. 그러나 일찍부터 선교활동을 시작하여 34개의 선교사 파송 단체가 29개 나라의 152명의 타 문화권 선교사를 파송했고, 193명에 달하는 교포 교회 목회자들도 있다.
「1991년 일본 개신교 교회통계」에 의하면 "1990년도 인구가 1억 2,314만 6,678명으로 집계되었다. 이 통계에 의하면 개신교 교회 수는 7,001개, 신자 수는 59만 2,909명, 예배 출석수는 24만 7,062명이다. 이 숫자는 일본 전체 인구의 0.2%만이 예배에 참석한다는 것이다. 1교회당 평균 예배자 수는 35명이다. 시(市) 중에서 교회 미 설립지역은 총 655개의 시 중에서 8개시이고, 교회만 설립된 지역은 77개 시(市)이다. 읍, 면 중에서 미 설립된 지역은 총 2,590개 읍`면 중 1,779개 지역에 아직 교회가 없다."
2. 일본 기독교 역사
1) 기독교의 전래
일본에 기독교가 전래 된 것은 1549년 예수회 소속인 프란시스코 자비에르(1506~1552)가 큐슈에 들어와 포교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자비에르는 포루투갈의 식민정책의 일환인 교화정책을 맡고 있었는데 포루투갈 국왕의 포교 보호권을 가지고 인도에 파견되었다. 이어진 말레이시아 포교시절에 일본인을 만나서 일본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1549년부터 약 2년 동안 일본에 체재하면서 약 1천명을 기리시탄으로 개종시켰으며 이 체험으로 장래 일본 선교의 방향과 방침을 제기하였다. 그는 천황에게 포교허가를 얻고 민가를 개조하여 일본최초의 교회로 삼았으며 당시 일본이 봉건사회체제라는 사실에 착안하여 영주계층을 적극적으로 개종시키고 나아가 가신과 영민(領民)을 개종시키고자 하였다.
16세기의 일본 민중은 구세력의 몰락과 구질서가 붕괴되면서 혼란스러웠고 이 때 등장한 선교사는 그들 사이에 쉽게 침투 할 수 있었다. 농민을 직접 지배하고자 했던 영주층은 사원과 결탁한 세력을 억압하기 위해 기독교를 받아들여 농민의 집단개종을 중개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특히 오다 노부나가가 사원대책을 취하면서 통일정책의 도구로 선교사를 보호하고 기독교를 이용한 것은 교세확대를 더욱 촉진하였다. 노부나가의 보호 아래에서 1575년부터 3년에 걸쳐 3층 건물인 남만사 기독교회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한편 1579년에 인도관구를 시찰하고 새로운 포교체제를 확립하는 임무를 띤 순찰사 발리냐노가 내일하여 일본 예수회에 박차를 가하게 되는데, 발리냐노는 일본 포교의 정황을 유럽에 자세히 전함으로써 유럽인들에게 예수회의 평판을 높이고 일본 포교열을 진작시켰다. 또한 그는 일본인의 예수회 입회를 촉진하고 신학교, 학원, 수련원 같은 교육기간을 설립하여 일본인 사제와 성직자의 양성에 착수하였다.
2) 기독교 금지령과 박해
1587년 그때까지 기독교에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던 히데요시가 그해 6월 돌연 하카다에서 을 발표하고 예수회 신부들에게 일본 퇴거를 명령하였다. 그리고 나가사키를 몰수하고 직할령으로 삼았다. 신국(神國) 일본을 표방하여 이단종교의 선교를 금한 이 추방령은 한편으로 상선의 내항만큼은 환영한다는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는데 사실 이것은 무역독점을 위한 포석이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예수회가 일본`포르투갈 양국 상인의 조정자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원래 목적이었던 상품의 독점매임에 실패하게 되자 금령을 완화시키고 나가사키에 포르투갈 인을 위한 교회재건을 허가하였다. 비록 그곳에 관리를 파견하고 봉행을 두었으나 나가사키는 이후에도 계속 기독교 도시로 남아 있게 된다.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