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인 조사] 김종삼론

 1  [한국 시인 조사] 김종삼론-1
 2  [한국 시인 조사] 김종삼론-2
 3  [한국 시인 조사] 김종삼론-3
 4  [한국 시인 조사] 김종삼론-4
 5  [한국 시인 조사] 김종삼론-5
 6  [한국 시인 조사] 김종삼론-6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한국 시인 조사] 김종삼론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김종삼론
1. 김종삼의 생애와 활동
김종삼은 1921년 3월 19일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친 김서영과 모친 김신애 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났는데, 형제로는 작고한 시인 김종문과 삼남 종인, 사남으로 고인이 된 종수가 있다. 김종삼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할아버지로부터 정신적 시조를 영향 받았다. 그의 시에 성당이나 교회에 대한 공간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는 계기로 볼 수 있다. 아버지는 언론인이여, 의 발행인으로서 지식층이었다. 또 그에게는 친할머니, 외할머니, 증조 할머니도 가까이 있어서 할머니들 슬하에서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는데,
그의 소유욕 강한 성격과 결벽증, 자기중심적 사고는 이러한 환경적 영향에 의한 소산으로 볼 수 있다. 은율에서 평양으로 이사간 후, 그는 소년 시절을 평양에서 보냈다. 1937년 7월 평양숭실학교를 중퇴한 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 이유는 ‘형이 먼저 가서 유학 중인데 자신도 무엇인가 하고 싶어서,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서’ 였다는 것이다. 1942년 2월 극단 극예술 협회 연출부에 입회하여 일하기 시작하였다. 1953년 5월 당시 군고위직에 있던 형의 배려로 다이제스트사 편집부에 입사했다. 같은 해 종합잡지《신세계》에 을 발표함으로써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쓰기 시작한 시’라는 물건을 처음에는 김윤성씨가 에 추천받게 해주겠노라고 세 편을 가져갔는데, 심사위원들의 눈에 들지 않아 추천을 거절당했다는 것이다. 너무 난해했으며 꽃과 이승을 노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종삼의 시의 진가는 김춘수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1955년 12월 국방부 정훈국 방송과 음악 담당으로 근무를 시작한 바 있고, 1956년에는 정귀례 여사와 혼인하였다. 1957년 김광렬, 전봉건과 더불어 3인 시집《전쟁과 음악과 희망과》를 펴낸다. 1963년 2월 동아방송 총무국에 입사했다. 1967년 4월 1일 일반직 사원 3급 2호로 제작부에서 근무하기 시작하여 1976년 5월에 정년 퇴임하였다.
그 후 자유롭게 생활하다가, 음주과잉에 시달리던 끝에 평소 지병이던 간경화증으로 1984년 12월 8일, 63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했다.
2. 김종삼의 시세계
1) 죽음에 대한 이중적 태도
김종삼 시에서 가장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것 중 하나는 죽음의식이다. 그에게 있어 죽음이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유년시절 친구와 마을 사람들이 전염병과 전쟁으로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았고, 이후 아우의 죽음과 전쟁으로 인한 수많은 죽음을 목격한다.
그로 인한 충격은 김종삼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깊이 각인되어 그의 시세계 전반에 뚜렷 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김종삼 시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죽음의식은 그러한 사실적 체험 이 남긴 뚜렷한 상흔이라 할 수 있다.
김종삼의 시에서 보여주는 죽음의식은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다. 전쟁을 겪으며 수많은 죽음을 목격한 시적화자에게 있어 죽음은 공포로 인식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이 가 장 사랑했던 가족과 흠모하는 예술가들이 속해있는 세계이며, 자신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속’의 세계를 초월한 ‘성’으로서의 세계인 죽음의 세계에 대해 매혹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 또한 그 세계에 편입되기는 열망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김종삼 시가 죽음의식을 통해 무엇을 드러내고자 했는가를 밝힐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준다.
① 전쟁체험과 공포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