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적 실학의 가능성과 한계 다산 정약용의 실용중시 교육관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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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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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실천적 실학의 가능성과 한계
다산 정약용의 실용중시 교육관을 중심으로
Ⅰ. 서론
Ⅱ. 정약용의 교육정책 시대적 배경
Ⅲ. 정약용의 실용중시교육관
1) 오학론의 비판
2) 불가독설의 제시
3) 기술개발의 장려(技藝論)
4) 실용적 학문의 장려
5) 교육방법의 전환
Ⅳ. 결론
Ⅰ. 서론
다산 정약용(1762~1836)은 18~19세기에 걸친 조선조의 사회 변동 속에서 많은 갈등을 느끼면서 불우한 생애를 보냈으면서도 불후의 학문적 업적을 남기고 간 당대의 석학이다.
그는 유년시절부터 부친에게서 시문, 경사의 학습을 습득하고, 목민관이었던 부친의 치적을 보고 들으면서 중앙 행정관료로(22~32세), 혹은 지방 목민관으로서(33~39세) 쌓은 경험을 그의 나이 40세 이후에 17년간의 강율 유배기간에 학문적으로 체계화 하게 되었다.
정약용의 사상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측면의 접근과 철학적 측면의 접근이 동시적공시적으로 이루어져야한다고 본다. 그의 사상의 기충에는 원시유학의 수기치인 사상이 바탕으로 이루고 있으며, 그 위에 당시 역사적 상황에 적응하는 기충사상으로 경세적인 근대지향 의식이 있어서 이 양자의 통일적인 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하겠다. 정약용의 학문을 일컬어 본격적으로 공자학에로 회귀한 개신유학이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 있는 것이다(이일호;1980;한국개신유학사시론;160-161 재인용). 그러나 정약용의 학문이 비록 상고적인 수사학에로의 회귀였다고 하더라도 이는 근본 일뿐, 실제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한국의 전통에 뿌리를 둔 개신유학이었으며 현실적인 제반 문제에 접근을 하였다. 정약용은 「자찬묘지명」에서 “신아구방”이라는 말을 하였는데, 이것은 조선을 새롭게 개혁하겠다는 것으로 그의 사상과 학문의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구절이라고 하겠다(정약용:1970:자찬묘지명:337 재인용). 다산은 기존의 사상과 질서에 대한 반성적 인식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학문 체게를 정립했다. 주자 성리학을 비판하고, 원시유학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하여 인격적도덕적 상제의 재인식, 실천 윤리로서의 효제자 및 새로운 인 개념의 정립과 수기와 치인의 통일을 시도하였다. 수기치인의 이상을 달성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 주체의 본질이 의지적 결단과 주체의 행위를 통해 완성되는 인격적 성숙을 의미하며, 이것은 결국 사회적 영역에 대해, 자신에게 부과된 최대한의 이상적인 능력과 역할을 수행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수기와 치인의 일치는 개인의 인격적 완성을 전제로 하며 이는 내면적인 초월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사’ 라는 실천을 통해서 완성된다.
본문에서는 다산 사상 형성의 시대적 배경과 교육정책 중 실용중시 교육정책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Ⅱ. 정약용 교육관의 시대적 배경
1. 정치 배경
다산 정약용(1762-1836)이 태어난 영정시대(1724-1800)는 새로운 학풍이 일어난 시기이기는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당쟁이 격심했던 숙종(1675-1720)시대의 바로 직후였다. 이미 예절 따위는 형해화되어 버렸고, 왕권은 관료들의 농간에 의해서 흔들리고 있었다(정약용;1983:사산학입문:16 재인용) 17세기 청의 침입으로 인한 정치적 권위의 추락, 양반들의 정권 획득을 위한 경쟁과 투쟁은 양전란 전보다도 더욱 격회되어 서인과, 남인, 그리고 서인 내부에서의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정권싸움이 벌어졌다. 영조 이후 탕평책이 이행되었으나, 더욱이 19세기 말 이후의 정권은 사실상 노론에 의해서 전단 되다 시피 되었다. 더욱이 19세기 초부터는 노론파에 속하는 안동김씨의 세도 정치가 60년간이나 계속되었다.
그리고 노론이나 척족이외의 사람은 정치 행정에로의 진출이 봉쇄되었기 때문에 양반사회의 세력은 매우 불균형하게 되었다. 영조는 노소의 싸움을 말리는데 힘을 기울였기 때문에 남인의 정치적 지위의 개선을 보아서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했다. 그러나 정조(1777~1800)시대를 맞아 비로소 남인을 기용하게 되었는데, 다산의 등용도 이와 때를 같이한다. 1800년 정조가 사망하고 18년간의 긴 유배생활동안 경사(經史)에 걸친 전 학문을 체계화 하였으며, 이때부터 정치 경제적 인식의 사상적 기반이 되는 경서학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유배기간을 왕성한 저술 활동의 기회로 활용하였고, 이것이 그의 학문적 바탕이며 현실적 사고의 실천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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