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초신 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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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석 초신 응식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멋’있는 시인, 석초 신응식
I. 작가의 생애와 문학 활동
신석초는 1909년 충남 서천군 한산면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본명은 응식이며 필명은 유인(唯仁), 석초(石初), 석초(石艸) 등이 있으나 주로 석초(石艸)를 썼다. 그는 부유한 가정에서 출생하고 성장하여 풍족한 삶을 살았으며 그의 부친은 두 사람의 가정교사를 두고 한학과 신학문을 동시에 교육시켰다. 석초의 부친은 권국담 선생을 초빙하여 석초의 한학 지도를 부탁했다. 국담 선생이 석초에게 한문적 감수성을 제공했다면 할머니는 고전소설의 감흥을 전수해주었다. 13세에는 사서삼경을 뗐으며 국민학교 3학년에 편입을 한 후 2년 후에는 검정고시를 보고 경성 제일고보에 들어가게 되었다. 입학 이듬해인 1926년 조혼의 풍습을 따라 2살 연상인 강영식과 혼인했다.
경성제일고보 3학년이 되던 1927년 신병으로 인해 학교를 휴학하고 요양을 마쳤지만 석초는 복학하지 않고 20세인 1929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일본 법정대학의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이 무렵 일본에 만연해있던 사회주의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갖고 카프에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유인(唯仁)’이란 필명으로 1931년에 『중앙일보』에 「문학창작의 고정화를 위하여」를 발표하였고 이듬해엔 『신계급』에 「예술적 정당화를 위하여」를, 『문학건설』엔 「싸베트 문학의 새로운 과제」를 연이어 발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카프는 큰 위기에 직면해 있었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당위성만을 제시했다는 이유로 카프 내부의 소장파들에 의해 비판을 받는다. 개념화 되어가는 카프 문학의 고정화를 비판하고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을 주장하고서 예술적 형상화에 관한 인식의 문제를 강조하던 석초는 카프에 회의를 느끼고 1933년 박영희와 함께 카프를 탈퇴하였다.
그 이후 우연히 발레리의 작품 읽고 크게 영향을 받아 학교도 포기하고 발레리의 작품을 통독하기 위해 프랑스어 개인교습을 받았다. 그때부터 발레리의 영향을 받아 순수문학으로 문학경향을 바꾸게 된다. 발레리에게 노장사상의 영향이 있음을 발견, 자신도 노장사상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면서 틈틈이 시를 쓰다가 1935년 신병으로 귀국한다. 그때부터 그의 시작활동이 본격화 되는데 이 때 그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사람이 위당 정인보다. 석초는 서구적인 것은 프랑스 발레리에게, 전통적인 것은 위당 정인보에게서 시세계를 구축해나갔다. 1935년 정인보의 소개로 시인 이육사와 사귀게 되었고, 육사를 통해 1935년부터 1940년까지 동인지 『자오선』『시학』『문장』 등에 발표됨으로써 시단에 알려지게 되었다.
1946년 첫 시집 『석초시집』을 간행하였고 해방 후 1949년 활동이 본격화 되며 이후 사무국장에 선임,『현대문학』시 추천 위원으로 임명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갔다. 1959년 두 번째 시집 『바라춤』이 간행되었다.
1969년 6월 아내가 사망한 뒤, 석초는 병을 얻었지만 같은 해 11월, 『예술원보』에 「한국의 꽃」을 비롯한 근작 10편을 한꺼번에 발표하여 건재를 과시했다.
1970년 제3시집 『폭풍의 노래』를 간행했다. 이 시기에 잡지 등에 발표한 작품은 제4시집 『수유동운』(1974), 제5시집『처용은 말한다』(1974) 등에 분산된다. 속초는 「꽃무리」라는 시를 끝으로 공식적인 작품 활동을 마감한다. 석초는 문학공보부에서 계획한 『한국문학대전집』에 수록할 장시 「천지」의 집필을 시도하다가 1975년 3월 8일 66세 일기로 천식과 장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II. 작품경향 및 문학작품
신석초는 앞서 말했다시피 카프에 가입했다가 발레리의 영향으로 순수문학으로 탈바꿈 서구적인 시적 방법인 상징주의에서 동양적 관조의 유현한 세계로 파고들면서 가장 한국적인 것에로 발전되어간 시인
해간 대표적인 문인이다. 신석초의 경우 시를 결정짓는 데 3개의 원천이 있다. 첫째가 한시와 동양고전에 바탕을 둔 전통적인 문화주의이다. 그리고 둘째는 프로문학 활동으로 이루어진 이데올로기 지향의 계열이고, 나머지 셋째는 서구문학, 특히 발레리를 원천으로 한 것이다. 이 세 가지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원천으로 작용한 것은 신석초 나는 생래로 순수한 한국적인 가정...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인습이 어디보다도 완고했기 때문이다... 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처음에 한학적인 학습, 특히 시에 있어서는 詩傳과 唐詩로부터 시작했다. 그 다음에 서구의 시에 접했다.
자신의 말대로 동양고전에 바탕을 둔 전통적인 문화주의이다.
여기서 신석초가 지향한 전통지향적 미의식의 구체적인 것은 바로 ‘멋’이다. 이 ‘멋’의 미학이 바로 신석초 순수시론의 큰 거점이다. 따라서 신석초의 전통지향적인 순수시를 분석하기 전에 그의 순수시론의 한 거점인 ‘멋’의 미학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문장」에 실린 「멋설」이란 에세이 “우리는 멋지다 혹은 멋이 있다고 말한다. 이 어휘는 특이한 것이다. 支那에서 말하는 풍류라든가 樂趣라는 것에 近似는 하지만, 스스로 의미가 다르다.”
참고문헌
V. 참고문헌
최승호(1994), 「신석초 시와‘ 멋 ’의 미학」,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용훈(2001), 신석초 연구, 역락출판사
이상오(2006), 한국현대시의 상상력과 자연, 역락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