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인 조사] 노작(露雀) 홍사용(洪思容)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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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노작(露雀) 홍사용(洪思容)론
1. 홍사용의 생애
노작 홍사용(1900. 5. 17~1947. 1. 7) 홍사용의 아호로는 노작(露雀)이외에도 소아(笑啞), 백우(白牛) 등이 있으나 작품 활동에는 주로 본명과 노작을 사용하였다.
은 경기 용인군 기흥면 농서리 용수골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홍철유는 경기 용인 및 화성일대에 많은 농토를 가진 지주였으므로 노작은 어린 시절을 남부럽지 않게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태어난 지 100일 만에 무관학교 1기생에 합격한 부친을 따라 서울로 상경하였다. 그러나 9세 때 부친이 사망하고 백부 승유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본적지인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돌모루)로 이사하였다. 그 뒤 부친이 그를 위해 만든 사숙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7세에 다시 홀로 상경, 휘문의숙에 입학했다.
휘문의숙 재학시절 동기인 정백, 1년 후배인 박종화 등을 만나 문학수업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그는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고, 3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풀려나 그해 6월에 고향에 돌아온다. 고향에서 정백과 함께 현량개에 은신하며 수필과 시를 쓰며, 월탄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후 홍사용은 ‘문화사’를 설립하고 문예지 와 사상지 를 기획, 만 간행했으나 3호로 단명하고 말았다. 또한 그는 우리나라 신극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1923년 근대극 운동의 선구적 극단인 토월회에 가담해 문예부장직을 맡았고 직접 서양극 번역과 번안 그리고 연출도 했다. 1927년에는 박진 이소연과 를 결성하고 1930년에는 홍해성, 최승일과 신흥극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30세 무렵부터 5년간 홍사용은 미투리에 두루마기 차림으로 화류목 단장을 짚고 전국 곳곳을 방랑했다. 1932년 에 희곡 을 발표, 1935년을 전후하여 세검정 근처에 자리 잡고 한의공부를 하여 한동안 한의사로 생계를 유지했다.
1939년 일제의 강요로 희곡을 쓰다가 붓을 꺾어 버렸다. 그는 이 일로 주거 제한 조치를 받기도 했다.
이후 강경, 전주 등지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모두 오래 가지 못했으며, 1944년 이화전문에 잠시 출강했다. 해방 후 근국청년단에 가입, 청년운동을 전개하려 하였으나 지병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47년 1월 5일 폐환으로 별세했다. 유해는 향리인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에 안장되어 있다. 생존 시에는 작품집이 나오지 않았고 1976년 유족들이 시와 산문을 모아 《나는 왕(王)이로소이다》를 간행하였다.
2. 작가의 경향
노작의 고향은 수원에서 30여리 떨어진 곳이다. 그가 태어난 농서리는 주봉뫼라고 하는 산이 있고 마을 앞으로는 현량개라는 냇물이 있다. 그는 학창 시절 수원의 화성, 광교산, 홍충문, 연무정, 장군대, 창용문 등을 바라보며 성 둑길을 따라 농서리로 걸어오곤 하였다. 이러한 그의 고향은 노작의 문학을 형성하는 데 내재적인 요인이 되었다. 시「통발」, 「어부의 적」, 「별, 달, 또 나, 나는 노래만 합니다 」, 「그러면 마음대로」, 「그것은 모다 꿈이엇지마는」,「나는 왕이로소이다」등과 수필「청산백운」, 소설 「귀향」등은 그 배경이나 소재가 고향을 통해서 나타난다.
노작은 강직한 성품과 고결하기로 정평이 나있었다. 그 예로 일제 강압에도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는 점, 죽어도 왜놈의 돈은 먹지 않겠다며 버틴 점, 그리고 일제 말 민족의 위기 상황 속에서 일제는 그에게 희곡「김옥균전」을 집필할 것을 강요하였지만 그것을 거부하여 일제에 의해 주거제한을 당한 점을 들 수 있다. 당시 한국 근대문학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대부분의 문학인들이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 온 반면 그는 경제적인 여건이 허락된 지주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유학을 하지 않았다는 점도 그의 성격을 반영하는 일면이다. 이러한 대담함은 그의 강직한 성품과 주체적인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