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월 박영종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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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목월 박영종에 대하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목월 박영종
목월 박영종은(1917~1978) 일제 말기인 1939년 에서 추천을 받아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후 40여년간 시작활동을 계속, 가장 실험적이고도 견실하게 시정신을 유지한 시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우리의 현대시의 주류를 이루어온 순수서정시의 지평을 심화하고 확대시킨 시인이다. 에 목월시를 추천한 정지용이 목월을 소월과 대비시켜 ‘북에 김소월이 있었거니, 남에 박목월이가 날만하다. 소월의 툭툭 불거지는 朔州(삭주) 龜城調(구성조)는 지금 읽어도 좋더니 목월이 못지 않아 아기자기 섬세한 맛이 좋다.’라며 목월을 소월과 맞세운 극찬을 아끼지 않았을 만큼 목월의 시가 현대시사에서 차지한 비중이 적지 않다 하겠다. 무엇보다 그는 향토적 정서와 성숙된 시적 표현, 정제된 언어 미학으로 나름대로의 시세계를 구축했고, 시에 대한 집념과 인생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치열한 시정신으로 보여준 시인이다.
목월은 1933년 계성 학교 3학년 재학중 동요 「통딱딱 통딱딱」과 「제비맞이」가 각각 지와 지의 현상에 당선되어 동시를 발표하고, 1939년 정지용의 추천으로 지 9월호에 「길처럼」,「그것은 연륜이다」가 1회 추천되고, 12월호에 「산그늘」이 2회 추천, 다음 해인 1940년 9월호에「가을 어스름」과 「연륜」이 3회 추천완료 되어 문단에 정식으로 등단하게 되었다. 박목월에 대한 연구는 목월을 문장지를 통해 추천한 정지용을 시작하여 100여편에 이르는데, 이들은 목월의 시를 다각도에서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목월에 대한 연구는 그의 초기 시집 과 에 집중되어 있고, 그 연구 성과들은 자연과 연계된 주제와 제재에 관련된 논의들이다. 이들은 대개 목월이 체질적인 자연 시인이며, 그의 자연은 동양적 자연과 상징적 자연으로 구분되며, 전 작품에서의 자연의 의미는 자연과 인생의 일체감으로 규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목월이 순수한 시에 대한 뚜렷한 의식을 가졌다는 점, 해방 전 여러 갈래의 시 흐름 중 전통성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계승, 발전시켰다는 점, 그리고 특히 언어예술적 관점에서 시의 작법을 향상시키는데 기여했다는 점 등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특히 청록파의 한 사람으로서 목월의 시에 대한 해석은 질적이나 양적인 면에서 ‘자연시’ 혹은 ‘고향시’로는 어느 시인에 못지 않게 풍부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목월시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는데 하나의 장애 요소로서 작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평가는 목월의 초기시에만 한정된 것으로 시작활동을 하면서 꾸준한 변모과정을 보여준 목월의 시세계 전반을 통찰하기에는 부적절하다.
작가는 사회적 환경 속에 살아가고, 상정된 독자와 끊임없는 소통을 꾀하는 존재이다. 작가는 자신이 놓여진 환경과 소통하면서 생각과 감정을 글로 표현하고, 상정된 독자는 글을 읽는 과정에서 작가와 의사소통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단지 작가가 고립된 존재가 아님을 보여주며 작가의 문학활동이 그와 유기적 연결고리를 맺고 있는 사회와 독자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과연 목월의 초기시에 대해 자연을 노래한 서정시라 단정지을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목월이 문학활동을 하던 시기의 국제적 정세에 따른 제국의 이데올로기와 이에 따른 패러다임의 변화는 문학을 비롯한 문화 전반에도 커다란 흐름을 형성하였고, 특히 전쟁의 종식과 더불어 탈식민주의적 문화는 문학의 중요한 배경이 되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태평양 전쟁은 마침내 일본의 패망으로 끝나고 조국은 해방되었다. 해방의 기쁨은 나라 전체를 민족을 열광하게 했으며, 이러한 뜨거움은 이윽고 좌우 투쟁으로 바뀌어 우리는 또 다시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하게 되었다. 처음 목월은 이러한 정치의 와중에 휩쓸리지 않았고, 의 폐간 이후 마루 밑에 묻어둔 노트와 작품들을 손질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그것은 타고난 숙명인 시의 세계에 맘놓고 정진하는 것이 자신의 인생의 지표요, 또 해방 조국에 대한 공헌의 길도 자신의 처지로선 오직 그것 뿐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러는 사이 서울에선 좌익 진영의 문학가 동맹에 맞서 민족진영 문인들이 조선 문필가 협회와 조선 청년 문학가 협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목월은 고향 친구이자 선배인 김동리의 권유로 청년 문학가 협회의 준비위원으로 참가하게 되었고, 의 추천 동기생이라고 할 수 있는 박두진, 조지훈과 함께 기성 시인으로서는 해방 후 처음으로 나온 창작 시집 청록집을 1946년 6월 6일, 세상에 드러낸 것이다. 이처럼 수적으로 좌익계보다 열세에 있던 민복 진영 시인들이 작품을 통해 그 진가를 과시한 기념비적 시집이었다. 좌익계는 물론 가만히 있지 않았다. 조국의 해방이라는 역사의 커다란 전환에도 불구하고 구태의연하게 음풍영월하는 현실도피의 시라고 그들을 몰아세웠으나, 김동리의 삼가 시인론이라는 청록집 작품 분석으로 통하여 그러한 공격은 봉쇄되었다. 한국 문단에서는 대표적으로 좌익계열의 문인들이 주도적인 활동을 하였고 이에 맞서는 우익으로 청록파가 등장하게 된다. 이는 당시 청록파의 박목월과 시집 청록집은 매우 분명한 입지를 지니고 있었고, 이는 목월에 대해 개인적인 감성에만 관심을 갖고 노래하는 서정시인이라는 꼬리표가 적절치 못함을 단서를 발견하게 한다. 즉, 목월을 포함한 청록파의 글들은 그들이 자리했던 노선과 그들의 시대의식과 역사의식, 세계관이 상호연계를 통해 서정시로써 표현되어졌을 수 있다는 것이였다. 이에 포스트컬러니즘의 국제적 문학의식과 자국내에서는 카프와 대치하는 문학으로써의 컨텍스트를 목월의 시에서 찾아보고 그의 시를 보다 폭넓게 이해하려 노력해보았다.
이와 같은 의식적인 탐구의 시각으로 목월의 시를 읽다보니 그 안에 수 많은 의미를 드러낼 수 있는 코드들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먼저 시적 구도와 이미지의 표현방법, 소재등을 카프와 비교하는 방법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이는 수업한 여러 문학 이해방법중 시대적 컨택스트를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할수 있기 때문이며, 또 이러한 연구를 통해 목월시의 세계관에 관한 발견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먼저 카프문학의 특질을 보는데 효과적인 설명을 위해 모델은 카프 내에서 자문학의 문학적 모델로 제시되었던 단편서사시로 하겠다. 이러한 카프문학의 가장 중요한 점은 목적성에 있다. 이는 주제의 구체성을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이러한 기본적 틀안에서 서사는 논리적 진행과 연결이 반드시 충족되어야 한다. 보다 더 구체적인 측면들을 살펴보면 그들의 서사 구도는 등장인물의 배역성, 주체(화자)의 분명한 역할, 강한 감정적 표현(돈호법, 감탄법) 등으로 목적성에 효과적인 도달을 의도한다. 소재 역시 매우 구체적이고 소재의 묘사나 상황의 묘사, 감정의 표현도 구체적이며 직접적이다. 이미지의 조성을 보면 이미지의 상호작용이 목적성을 돕는 정해진 구체적 심상으로 귀착된다. 또한, 그들의 세계관은 확고한 유물론에 근거하고 있고 인간의식체계중심의 세계관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지금까지 간략하게 언급된 카프의 성격들은 박목월의 시세계와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다. 이러한 대립 구도를 통해 목월의 시에서 드러나는 여러 시적구도와 그것이 포스트 컬러니즘과 세계관을 어떻게 반영하는지 함께 살펴보겠다. 그의 시는 전체적으로 서사의 논리적 연결성이 적다. 그대신 그는 서사의 연결고리를 여백과 정조로써 처리하고 있다. 의식적인 절제는 서사의 정교하고 논리적 시스템을 약화시키고 이는 시 속의 이미지와 서사의 무한한 소통가능성을 만들어준다. 이러한 서사성이 상대적으로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서구의 합리주의에 반한 것이며, 선동의 효과를 극대화 시켜야 하는 목적시와는 완연한 차이를 보인다. 지속적인 구도에서의 논리적 서사가 아닌 단편적 이미지는 독자로 하여금 텍스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장치이다. 물론 현재까지의 연구에서는 이러한 점이 고려되지 않은 채 겉으로 드러나는 목월 시세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두번째로 목월의 시는 매우 관조적이다. 이는 구체적인 감정을 강하게 드러내는 목적시나 감상적인 서정시와도 차이를 갖는 점이다. 대상을 묘사하거나 노래할때도 그의 표현은 매우 절제되어 있고 구체적인 묘사나 직접적인 개입을 줄이고 있다. 이는 앞서 말한 이미지와 서사의 유연성 - 여기서 유연성이라 함은 자유로운 서사 구조의 생성과 해석의 다양성을 의미 한다. - 을 돕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의 시에서는 시적 화자의 주체로서의 역할을 가진다든가, 자연이 객체가 되는 인간의 시선이 최재한 배제되어 있다. 자연을 주체로 불러들이는 순간 그 주체는 객체가 되어버림을 목월은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상을 묘사하거나 노래할 때에도 목월의 표현은 매우 절제되어 있어서 시적 화자의 직접적인 개입을 줄이고 있다. 이는 앞서 말한 서사의 유연성을 지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즉, 시에 등장하는 소재들의 배역성이 적으며 화자의 주체적 역할 또한 크지 않다는 것은 관조적임으로 이야기될 수 있고, 이러한 부분들은 그의 시가 대부분 자연물을 소재로 택하고 있음과 더불어 인간 중심의 시스템과 상대되는 그의 세계관을 읽어내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또한, 이처럼 적극적이지 않은 주체성과 관조적 태도는 지배적 시스템에서 벗어나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의 대표시 중 하나인 나그네의 이미지처럼 그는 현실에서의 타자이며 동경하는 자유로운 이상에는 현실적인 일치가 불가능함을 안타까워했던 것이다. 앞서 얘기한 여백과 정조를 통한 서사의 연결은 합리적 시스템과 상대되는 그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목월이 자신의 입지에서 시대적 의식을 담기 좋은 방법으로도 보여진다. 즉, 그러한 구도는 텍스트의 의미발화를 창조적이며 폭넓게 만들어 주므로 심미적인 서정과 감성적인 만족을 전달해줌과 동시에 여러 의식들을 드러나지 않게 배태하고 있을수 있는 것이다.